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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볼만한 곳-홍길동 저자 허균의 묘소 및 허난설헌 시비

용인신문 기자  2000.05.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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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면 맹리 양천허씨 묘역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묘소 및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 시비가 모셔져 있다.
용인이 문학적으로 풍성한 재원을 가졌음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곳이 아닐 수 없다.
이곳 묘역에는 허균, 난설헌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학문과 문장으로 유명했던 허균의 부친 허엽을 비롯 두 형인 허성, 허봉의 묘소가 함께 한다. 허난설헌 묘소는 경기도 광주에 모셔져 있다.
아늑한 기운이 감도는 허씨 묘역. 너른 잔디밭이 깔려 있고 이끼낀 석물들이 쓸쓸해보이는 묘역을 수백년 세월 지키고 있다.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허균과 허난설헌.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서 학자며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어머니는 강릉 김씨로서 예조판서 광철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이 이복형으로 허성은 선조대에 학문과 덕망으로 촉망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동복형인 봉 역시 학문과 시인으로 유명하다.
허난설헌과 동복 형제인 허균에 대한 당시 평가는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명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아무도 뒤따를 수 없던 총명함으로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은 반면 사람됨에 대해서는 경박하고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해 행실을 더럽혔다는 부정적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허균은 이미 9세때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으나 워낙 구애없이 자유분방하게 성장해 재직중에도 기생을 끌어들여 별실에 숨기고 즐기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해 파직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유학자로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교를 숭상, 매일같이 염주를 목에 걸고 부처를 모셔놓은 후 향을 피우며 배례한 것은 물론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천주교 기도문을 얻어 오기도 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봉가이기도 하며 지봉 이수광과는 동서 지간이다.
국제정세에도 밝았고 군병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사회개혁을 주장하고 당시 악법이었던 서얼차별의 철폐를 주장했던 허균은 필생의 염원이었던 사회개혁을 모의도중 사건 전모가 탄로나 광해군 10년 50세의 나이로 능지처참 당해 일생을 마쳤다.
능지처참은 대역죄인에게 내리던 극형으로 머리 몸 손 팔다리를 토막쳐서 죽이는 사형. 허균의 시신은 사방에 흩어져 이곳 맹리 묘역은 시신 없는 허묘다.
허 설헌의 시비는 묘역 바로 입구에 서있다.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던 난설헌은 신동이란 소리를 듣던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으로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표적 여류 시인.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후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로 책과 먹으로 고뇌를 달래다 27세에 생을 마쳤다. 그녀의 작품 일부를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줘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돼 격찬을 받았고 일본에서도 분다이가 간행, 애송됐다.
이곳 시비는 국어국문학회에서 건립한 것으로 유서인 "閒見古人"이 새겨있을 뿐 시는 실려있지 않다.
지금 용인은 이곳 맹리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걸출한 문학가들이 잠들고 있는 사실에 대해 무관심과 방치로 일관하고 있다. 용인시 향토유적으로조차 지정되지 못한채 영화롭던 명문가의 몰락은 어두운 뒷 그림자를 길게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