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자매지인 ‘더굿피플(The Good People)’에 연재하고 있는 ‘명가(名家)를 찾아서’ 팀은 지난달 28일 용인시민과 지역내 학생 56명과 함께 기묘명현의 표상 김세필선생 유적지 답사 기행을 다녀왔다. 용인신문사와 더굿피플이 주관하고 (사)용향토문화연구회(회장 홍순석)가 주최한 이변 답사기행은 경주김씨문간공시십청헌파종회(회장 김건열)의 후원으로 수지구 죽전동의 김세필묘역과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의 지천서원 등에서 뜻깊은 답사를 진행했다. <편집자주>
“김세필은 학술과 재예가 뛰어났으며, 자상하고, 스스로 삼감으로써 시류의 무리배들과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십청헌 선생에 대한 사관의 평이다.
경학(經學)과 시문(詩文)에 모두 뛰어나, 도학자요 문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김세필 선생.
첫번째 명가 유적지 답사에서도 김세필 선생의 자취와 얼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처인구청을 출발한 버스는 죽전동 김세필 묘역에 도착했다. 홍순석 강남대교수와 관광해설사, 그리고 묘역에서 직접 합류한 답사자들은 어른과 아이들로 나눠 해설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문화재의 이해를 도왔다. 이후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로 이동해 후학을 키우시던 선생의 뜻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답사자들의 발길을 같이 따라가 본다.
#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 선생
김세필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 지비옹(知匪翁),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홍문관의 정자, 박사를 거쳐 수찬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1504년 갑자사회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으며, 1506년(중종1) 반정으로 풀려나서 홍문관 응교로 기용되었다. 그 뒤 대사헌, 이조참판을 지내고 1519년 기묘사화때 조광조가 사사되자 임금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규탄하다가 유춘역으로 장배되었다. 1522년 풀녀났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공자당을 지어 후진을 교육하였다. 사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충주의 팔봉서원과 지천서원에 향사되고 있다.
# 경주김씨 문간공 십청헌파 묘역
(용인시 죽전동)
조선중종때 이조참판을 지낸 문간공 김세필과 그 후손들의 묘역일원인 이곳은 1999년 4월 26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92호로 지정되었다. 산23번지의 묘역에는 가장 위에 김세필 선생의 모친 진천 송씨의 묘소가 있다. 그 아래 쪽으로 김세필, 김저, 김구, 김원경, 김중경, 김득곤의 묘소가 있다.
# 지천서원(知川書院)
(충북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십청헌 김세필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팔성산 아래 공자당을 짓고 후학을 교육하였는데 이것이 지천서원의 시초이다. 이 서원은 대원군 당시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단을 만들고 1906년 재건되었으며 1963년 중수하였다.
# 공자당(工字堂)
공자당은 김세필 선생이 지비천으로 입향한1522년 이후 생을 마감할때(1533)년까지 12년 동안 강학하던 곳이다. 눌재 박상(朴祥)이 충주목사로 있으면서 집을 지어 주었는데 집의 모양이 공자(工字)와 같았다하여이름을 공자당(工字堂)이라 하였다. 공자당은 강학장소인 동시에 관직에서 물러난 선비들의 집회소로도 역할을 했다.
지금의 공자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 2칸은 대청마루이며 양쪽 끝에 한 칸씩 방을 두었다. 일반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민도리집 형태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모현재(慕賢齋)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마라방 천장벽에는 중수기가 걸려있다.
# 지천서원 소장문서
지원서원에는 상촌선생이 생전에 짚었다는 지팡이가 전하며, ‘지천서원지’’육선생문집’을 비롯하여, 집강안(執綱案), 청금록(靑衿錄), 제관록(祭官錄), 지천강규(知川講規),강계좌목(講계좌목), 봉심록(奉審錄), 도기(到記), 완문(완문), 통문(通文), 청액상소초(請額上紹招), 홀기(笏記) 등이 있다.
# 변란이 생기면 우는 홰나무
김세필 선생은 팔성리에 거주하면서 동서남북과 중앙에 한 그루씩 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세그루는 죽고 남쪽과 중앙에 심은 홰나무만 살아 있다. 이 홰나무는 나라에 변란이 생기면 은은하게 울어 변란을 미리 알려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심은 김세필 선생의 충정심이 깃들여진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다.
왕도정치를 간청한 김세필 선생
이수현 | 동백초등학교 6학년 4반
아침 일찍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버스는 달리고 달려서 죽전동에 있는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묘역에 도착했다. 묘들의 맨 위에는 어머니의 묘가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면서 묘를 구경해 보았다.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정성스레 가꾼듯한 무덤들이였다.
무덤들은 주변 환경과 너무 잘 어울렸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덤하나만 덜렁 있는 초라한 무덤도 아니었다. 그 뒤를 이어 양상과 문인상도 보였다. 양상은 배가 볼록한 게 마냥 귀여웠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던 중 호기심이 많은 나는 그 자리에서 ‘왕도 정치’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선생님이 말하시길 ‘왕도 정치’란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라고 말해 주셨다. 참 좋은 뜻 이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십청헌 김세필 선생님이 임금님 앞에서 왕도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간청하는 모습이 눈에 그리듯이 생생하게 보였다. 마음고생이 참 많으셨을 것이다.
긴 계단을 내려가 보니 김세필 선생님의 문학비가 있었다. 이 비에는 김세필 선생님이 18살 때 임금님 앞에서 주제에 맞게 즉석에서 바로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김세필 선생님은 참으로 똑똑하신 분이셨나 보다. 모두 계단을 내려오자 버스는 우리를 싣고 충북 음성을 향해 달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천서원으로 갔다. 지천서원은 김세필 선생님께서 벼슬에서 물러나 공자당을 짓고 학생들에게 후학을 가르친 곳이라고 한다.
서원이라는 말에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에 가는 길목에 우리는 십청헌 선생님의 후손이시자 회장님이신 할아버지를 만나 보았다. 그분은 아는 것이 참 많으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또 한 개의 문학비가 있었다. 이것 역시 십청헌 선생님의 문학비였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십청헌 선생님만 2개의 문학비를 가지고 계신다고 한다. 이 시는 아까의 시와는 달리 말년쯤에 쓰신 시라고 한다. 나는 이 시가 마음에 들어서 큰 소리로 읽어 보았다.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 시였다. 더 올라가 보니 많은 비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그때 선생님이 비문의 한자를 읽어보라는 문제를 내셨는데 한자를 잘 모르는 나는 다 읽지 못했다. 한자공부 더 열심히 할걸 하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지천서원 입구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계단을 오르는 법과 인사하는 법과 주의 사항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공수도 해보고 인사도 해보면서 열심히 따라해 보았다. 직접 해 보니까 훨씬 이해하기도 쉬웠다. 드디어 계단을 걸어 가본다. 왼발 오른발 하면서 올라가는데 어찌나 헛갈리던지 고생 좀 했다. 와 드디어 입구다. 감탄사를 내뱉고 싶었지만 조용히 해야 한다는 말씀에 입을 꼬옥 다물었다. 서원으로 들어가 보니 사당이 있었다. 보통 사당들은 뒤에 있는데 오히려 앞으로 나와 있다. 옆에는 또 다른 건물 공자당이 있었다. 사당에서는 제사를 지냈고 공자당에서는 공부를 가르치셨다 한다. 우리는 직접 제사를 지내보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절을 해 보았다. 힘들긴 했지만 재미도 있었다.
절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절은 하는 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했다. 최대 5번까지 있는데 5번은 임금님에게 올리는 제사라고 한다. 또 몸을 낮출수록 상대방에게 더 많은 존경심을 나타낸다고 한다. 우리는 절을 끝내고 서쪽문을 지나 학생을 가르치는 공자당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그곳의 문은 매우 작았다. 이것은 고개를 숙이기 위해 일부로 작게 한 것이라 한다. 이와 더불어 밑을 보고 들어보라고 문지방도 높게 했다고 한다. 이 사당 옆에 있는 사원은 공자당 으로 불린다. 집의 모양이 공자(工字)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루가 그늘이 져 살짝 검은 빛이 도는 모습이 매우 시원해 보였다.
드디어 모든 답사 코스가 끝났다. 정말 유익한 시간이였다. 김세필 선생님은 조광조 선생님 등 유명한 분들에 가려져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이렇게 훌륭하신 분인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김세필 선생님에 대해 배운 것을 돌이켜 보았다. 선생님과 관련된 문화를 더 알아보아서 김세필 선생님의 또다른 업적을 찾아내고 싶어졌다. 이젠 우리가 선생님의 정신과 업적을 이어갈 차례다. 김세필 선생님 기다리세요! 저희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