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 남대천은 수 백만 마리의 연어가 태어나는 곳, 이 연어들이 이곳 남대천에서 태어나 적도를 가로지르고 세찬 파고를 넘어 남태평양 연안에까지 힘겹게 헤엄쳐 가서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고향인 남대천으로 귀류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으로 태어나 50년 동안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한 치의 발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애달픈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던 이북도민회 회장 김성원씨(60)는 지난 13일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본 감회가 그 누구보다 남달르다.
“김대통령이 전세기에서 내려 북측 김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는 그가 지난 14일 2차 정상회담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오는 8.15일 이전까지 실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또 한번 눈물을 흘렸야만 했다. “이젠 꿈속에서만 보던 고향땅과 혈육들을 살아서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두 정상이 반드시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꼭 풀어달라”며 목이 메이는 듯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그의 가족이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온 것은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겨울, 당시 김회장의 나이는 겨우 여섯살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북도 회령에서 목회일을 보시던 아버지는 해방 후 북쪽의 정세가 소련의 체제인 공산당 쪽으로 흐르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어린 자식들을 등에 업고 정든 집과 세간살이를 모두 버린 채 당장 입을 옷가지와 몇 끼를 때울 수 있는 주먹밥을 싸들고 평양으로 향하는 열차의 짐칸에 몰래 올라 탔다. 그 당시 어린 나이의 김회장의 눈에도 분명 큰 일이 생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사히 평양에 도착한 후 낮에는 괴뢰군를 피해 숲속에 숨어있고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 되면 3살된 동생은 어머니의 등에, 6살된 김회장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 20일간을 계속해서 걸은 후에야 한탄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탄강을 건너면 완전한 자유였지만 무정하게도 괴뢰군들의 감시는 철저했고 그들을 피한다해도 한 겨울의 한탄강을 어린 아이 둘을 등에 업고 건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한탄강을 넘어 자유를 찾은 그의 가족은 서울 용산 미8군부대 인근 해방촌에서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월남한 사람들을 모아 한마을을 형성한 해방촌, 그 곳에서 반반한 건축자재 없이 깡통을 펴 지붕을 올리고 박스?뜯어 벽을 발라 비와 바람만 막고 간간히 살았고 미8군에서 지급한 밀가루로 죽을 쑤어 끼니를 떼웠야 했던 해방촌의 3년은 너무나 길고 비참했다며 지난 기억이 되살아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마 안정된 생활도 잠시, 또 6.25전쟁이 발발해 다시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김회장이 용인에 정착해 살게 된 것은 1954년, 용인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청년시절 잠시 용인을 떠났다가 84년에 다시 용인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현재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전국 부동산중개업협회 용인시 지회장을 맡고 있고 이북도민회에서 2년간 청년회 부회장직을 맡아오다가 작년 5월에 이북도민회장에 취임해 지금까지 실향민들의 대표자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다. 또 모교인 용인중·고등학교에서 총동문회 이사를 맡아 학교 봉사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올해로 환갑을 맞는 김회장, 올 여름에는 사랑하는 부인의 손을 잡고 예쁜 딸 내외와 함께 그가 그토록 그리던 고향땅 한자락인 금강산을 찾을 계획이다.
“소주를 마시면 으레 ‘삼팔선의 봄’, ‘전선야곡’ 등 고향에 그리는 슬픈 노래만 목청이 터져라 불렀다, 그러나 이젠 남북 두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서로 악수와 포옹을 나누는 이 마당에 이런 노래가 어울릴성 싶으냐”는 그의 말 속에서 마음은 벌써 그의 고향인 함경도에 있음을 느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