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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는 도학정치의 혼

용인신문 기자  2000.09.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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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2) 조광조묘소

심곡서원에서 유림 원로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맞은 편에 있는 정암(靜菴)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묘를 찾아 나섰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공사현장을 빠져 나와 길모퉁이에 차를 대니, 밤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공사현장을 내려다 보고있는 선생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개국공신 온(溫)의 5대 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당시 무오사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고,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당시의 시대적 추세는 중종반정 이후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자는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 )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에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는데, 그 해 가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선생은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구현을 주창하였는데, 이로 인해 능력있는 신진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어 정계와 학풍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는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뒤에 퇴계와 율곡 같은 대학자들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그러나, 신진 선비들의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원로 대신들의 견제를 꾸준히 받아 오다가, 급기야 1519년(중종 14)에 중종반정 때의 공신책록에 문제가 있었음을 상소하여 76명을 공신훈적에서 삭제한 이른 바, 위훈삭제 사건으로 인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훈구파들의 조직적인 음해와 탄핵을 받은 선생은 능주로 귀양을 갔다가 그 해 12월에 사약을 받고 귀양지에서 38세의 나이로 아까운 젊은 생을 마쳤다.
이 해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하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은데다가 정치적 경륜도 짧아 개혁을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추진하다가 경험이 많고 노련한 훈구 세력들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율곡의 지적처럼 선생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치 일선에 나아가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어찌 아깝다 하지 않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사회 전반에서 개혁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이 있게 마련인데, 선생의 행적을 통해 그 지혜를 찾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율곡은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선생을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불렀다.
선생은 그 뒤 선조 초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전국적으로 그의 학문과 안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이 설립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파트 공사현장에 둘러싸여 초라하게 남은 심곡서원과 선생의 묘소 만이라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 교육기관 설립을 빙자하여 서원 소유의 재산을 가로챈 학교법인으로부터 이를 돌려 받으려는 지역 유림 원로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최근에 시민단체들이 적극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묘소 앞에서 후학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이라고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하던 유림 원로들과 헤어지면서 가슴 답답한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 이 날 따라 쓰르래미 울음소리가 유난히도 서글프게 들려 마치 선생의 통곡소리를 듣는 것 같아 민망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