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석가여래좌상은 신갈에서 오산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의 공세리 마을 안쪽 신갈저수지변 민가 담벽 한 구석에 5층석탑과 함께 불두(佛頭)가 사라진 채로 남아있다. 이 석가여래좌상이 위치한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264번지 일대는 고려시대의 절터였는데 일명 안양사지(安養寺址)라고 전해진다.
불상의 목은 절단되어 어디론가 사라졌고 좌우의 손목도 부러져 잘려나간 상태로 남아 있다. 10여 년 전 만해도 불두(佛頭)는 목이 절단되는 했지만 제 위치에 얹혀져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 고장의 향토사학자인 이인영(李仁寧) 선생이 쓴 「내고장 용인 문화유적총람」에는 1985년 당시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이 실려 있어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니 그나마 무척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을 통해 본 불두는 육계가 선명하고 눈은 움푹 패인 상태이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민간 신앙의 영향으로 부처님께 소원성취를 기도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쪼아냈기 때문인데, 좌상의 조각 기법으로 보아 이 불상 제작 당시의 불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일반堧막?부처가 가사(袈裟)를 입는 형식은 가사로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通肩)과,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어서 노출시키고 왼쪽 어깨에만 걸치는 우견편단(右肩偏袒) 등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좌상은 통견의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앞가슴에는 엄액의(掩腋依) 즉, 윗도리에 걸치는 의복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내려 덮는 의복의 모양이 보이고, 길게 늘어진 법의(法衣)는 결가부좌한 자세 위로 가사 속에 입는 군의(裙衣)가 서너 겹 곡선을 그으며 양각되었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이로 보아 이 부처는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좌대는 하대(下臺)로 장방형으로 상단에 16판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고 하단에는 안상(眼像)을 두었는데, 하대 위의 면석은 없어졌고 상대(上臺)는 앞에 있는 5층석탑의 기단석으로 놓여 있다. 이 불상은 그 제작 기법으로 보아 바로 앞에 위치한 공세리 5층석탑과 함께 고려시대 안양사의 창건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이 불상 주변에는 깨어진 기와조각들이 많이 보이는데, 불상과 탑 주변에 옹기종기 들어선 민가 주택 때문에 이제는 그 옛날의 운치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오늘도 예나 다름없이 명경지수처럼 고요한 신갈저수지를 바라보면, 중생 제도와 불법의 구도를 위해 이 곳에서 수도 정진했을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고속도로 소음을 뚫고 귓가에 들려오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