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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한을 품에 안고

용인신문 기자  2000.10.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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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7) -음애 이자 선생묘

민속촌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어지러운 아파트 공사현장을 벗어나 두암산 고개를 넘어서면 긴 계곡을 따라 아담하게 형성된 지곡리를 만나게 된다. 마을을 관통하며 흐르는 시냇물은 오염이 되지 않아 명경지수처럼 맑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랜만에 시원한 느낌을 준다. 마을로 들어서면 길 입구에 마을 사람들이 최근에 만들어 세운 장승이 서 있어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 주는데, 그만큼 이 마을 사람들이 유서깊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소중하게 느끼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마을회관을 돌아서면 북쪽 산기슭에 몇 그루의 노송이 보이고 노송 사이로 몇 기의 무덤이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음애 이 자 선생이 묻힌 곳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 때의 명신으로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涯)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의공(文懿公)이며 본관은 한산(漢山)으로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주창하였던 기묘명현 중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종 11년(1480)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부친의 부임지인 영남, 관동지방을 따라 다니며 성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의협심을 강하고 매사에 신중하였다고 한다.
연산군 7년에 22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나섰는데, 이조정랑에 있으면서 항상 연산군의 폐정 하에 벼슬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여 일부러 한직으로 전전하였다. 중종반정 후에야 서울로 올라와 홍문관 교리를 거쳐 부제학에까지 오른 그는 이때부터 정치에 직접 관여하여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폈으나, 훈구대신들이 일으킨 기묘사화 때 사건에 연루돼 파직되어 음성, 용인, 충주 등지에서 은거하였는데 시와 술로써 여생을 소일하다가 중종 28년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선생이 죽은 지 6년 뒤 관작이 복원되고 문의공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아울러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 곳 지곡리 일대의 땅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선생은 조광조, 조광보, 조광좌 등과 함께 마을 입구에 사은정을 세워 학문과 마음을 닦으면서 개혁정치의 큰 뜻을 세웠으나, 결국 현실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말년에는 한(恨)을 품은 채 아까운 생을 마쳤다. 그 옛날 산 좋고 물 좋은 심산유곡이라 하여 숨어살기에 적당하다고 자리잡았던 이 곳도 이제는 어김없이 불어닥친 개발 바람으로 점점 옛날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민속촌이 다른 지방으로 옮긴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로 민속촌이 떠난 자리에 대규모 아파트촌이 형성될 것이 자명하다고 하여 마을에서는 벌써 걱정이 태산같다.
묘소 앞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곳곳에 배어있는 선생의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는데, 변해 가는 주변환경과 어지러운 세상일을 생각하면 한 때나마 이상정치의 큰 뜻으로 세상을 호령했던 선생의 웅지(雄志)가 무색하게 느껴져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