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갈에서 국도를 따라 용인으로 가다보면 어정삼거리를 지나 상하리를 거치게 된다. 상하리는 어정에서 신갈로 흘러드는 구흥천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구흥천을 가로지른 다리를 지나면 왼쪽에 마을 중심에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고인돌은 바로 이 상가의 공터 안쪽 한 구석 도로 밑에 숨어(?) 있다.
이 고인돌은 용인에서 수원으로 이르는 국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마을에서 당집을 만들어 보호했으나 1970년대 불어닥친 새마을 운동으로 당집은 헐리고 곧이어 국도가 개설되어 도로를 포장하면서 도로지면이 높아지는 바람에 고인돌의 위치가 도로 약 2m 정도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로 도로가 자꾸 확장되면서 당국에서는 이 고인돌을 이전하여 복원하려 하였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도로포장을 거듭하면서 고인돌의 위치는 더욱 낮아져 지금은 고인돌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조차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고인돌의 앞, 뒷면의 면석은 훼손되어 없어지고 좌우의 면석만 남아 개석(蓋石)을 힘겹게 받치고 있는데, 그나마 개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 있다.
마을 노인들에 의쨍?해방이 될 때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두 개의 고인돌이 있어 윗쪽에 있던 것을 상지석, 아래쪽에 있던 것을 하지석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아래, 위의 고인들의 이름을 따서 상하리라고 했다고 한다. 위쪽에 있었던 고인돌은 「할아버지 바위」라 불렸으나 지금은 사라져 흔적도 알 수 없게 되었고, 「할미바위」라고 불렸던 아래쪽 고인돌만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옛날부터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황소 한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제물로 바치며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빌고 질병과 재액을 막아 달라는 의미로 동제(洞祭)를 지내왔는데 근래에 와서 그나마 이러한 습속도 사라졌다고 한다.
원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부족장의 무덤이었다. 그러므로, 이 마을에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상당한 정치적 세력을 가진 집단들이 거주해 오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상하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정한 구흥천변에 자리잡은 아담한 작은 시골마을답게 아기자기한 시골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요즘에는 잘 발달된 교통여건 때문에 마을 전체가 공장지대로 바뀌어 그 옛날의 풍광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렸다. 더군다나 마을의 남쪽에 자리잡아 늘 포근한 느낌을 주던 앞산을 통째로 들어내고 그 곳에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어서 하루 종일 자동차 소리와 건설현장에서 들리는 소음 때문에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켠으로 쓰러진 채로 남아 있는 고인돌 앞에 서서, 그 옛날 이 마을에 터를 잡아 주변 고을들을 호령하던 고인돌의 주인공을 생각해 보면 지나간 세월의 무상함을 절로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