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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호국의숨결

용인신문 기자  2000.12.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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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12) -처인성(하)

「문화유적총람」에 보면, 처인성은 고려 때 몽고가 침입했을 때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가 축성한 전설이 있으며 1232년(고려 고종 19)몽고의 제 2차 침입 때 몽고장수 살리타이가 개경과 남경을 함락하고 이 곳 처인성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던 김윤후가 승병을 이끌고 이 곳에서 접전, 적장을 사살하여 몽고의 제 2차 침입을 격퇴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적장을 사살한 곳을 사장(死將)터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측 사서인 원사(元史)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살리타이가 갑자기 날아온 (流矢)에 맞아 죽자 별장(別將) 철가(鐵哥)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고 제 2차 침입이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이가 사살됨으로써 극적으로 반전되어 몽고군이 철수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렇게 국면을 반전시킨 결정적인 전투치고는 너무 간략하고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당시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막강한 몽고군의 전투치고는 너무 어이없는 패배인 셈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4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승병(僧兵)들이었고 지휘자인 김윤후도 전투경험이 없는 승려라는 점이 더욱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또, 지금의 처인성 터라고 전해지는 곳도 그 주변환경이나 전체적인 규모로 보아 외적을 맞아 전투를 벌일만한 공간, 즉 주성(主城)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성(城)이란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인공적으로 설치한 구조물을 이른다. 그러므로, 모든 성을 축조할 때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거나 방어하기에 용이한 위치를 잡아 축성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처인성은 이렇게 성으로서의 기본적인 틀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처인성은 토축으로 형성된 성(城)의 주위는 약 3리(里)였으나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고, 다만 군창(軍倉) 만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에 어느 재야학자에 의해 현재 처인성 터의 위치가 잘못 비정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곧 나오게 될 발굴보고서의 내용이 궁금해질 뿐이다.
오늘도 처인성 앞의 탁 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