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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에 실린 충절의지

용인신문 기자  2000.12.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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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13) -충렬서원

최근들어 용인지역의 대표적인 난개발 현장으로 알려진 죽전으로 들어서면 오포 방향으로 넘어가는 산허리를 잘라 4차선 도로를 만드느라 공사가 한창인데, 여기 저기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아파트를 분양한다는 건설회사의 광고와 난개발을 저지하겠다는 주민대책위가 내건 반대 문구가 어울려 이 곳 역시 조용한 곳은 아닌지 오래된 것 같다. 아파트 신축공사가 한창인 대지산을 넘어 오포방향으로 1㎞를 내려가 모현면 능원리에 이르면 충렬서원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 9호로 지정된 충렬서원은 1576년(선조 9)에 지방 유림에서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했는데, 나중에 그의 손자인 정 보(鄭 保)와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대대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왔으나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일시 없어졌다가 1911년에 유림에서 사우(祠宇) 중건을 시작으로 계속 복원하다가 1972년에 이르러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사우(祠宇),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과 강당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우에는 정몽주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보와 이시직의 위패를 배향하여 매 년 3월 중정(中丁)과 9월 중정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정몽주(1337∼1392)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으며 1357년(공민왕 6)에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그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한양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며,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헸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사정은 이미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이들을 제거하려던 정몽주의 계획도 나중에 태종이 된 이방원(李芳遠)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됨으로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 충효를 겸비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가 남긴 많은 시문(詩文)은 호방┛?뛰어났는데, 특히 그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서원으로 들어서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면 선생의 의로운 충절이 담긴 『단심가(丹心歌)』의 곡조가 나뭇가지에 이는 찬바람에 실려 귓바퀴를 멤도는데, 오늘도 찾는 사람이 없어 혼자 서 있는 서원 마당에는 낙엽 만 여기 저기 수북하게 쌓여가고 있어 세상 인심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