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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호국의숨결

용인신문 기자  2000.12.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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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11) -처인성(상)

천리에서 우회전해서 남사면으로 가는 작은 도로를 따라 도살장 고개마루에 올라서면 길게 펼쳐진 자그마한 들판이 나타난다. 좁은 계곡을 따라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 계곡을 벗어나 추수가 끝난 넓은 들판 한 가운데로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처인성(處仁城) 터가 나타난다. 아곡리 들판 한 가운데 낮은 언덕이 있고 그 입구에 처인성 터라는 안내판이 선 뒷편으로 옷을 모두 벗은 수 십그루의 나무들이 덩그러니 서서 차가운 바람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는데, 이 곳이 경기도 지방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이른 바 처인성 터로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토축으로 형성된 성(城)의 주위는 약 3리(里)였으나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고, 다만 군창(軍倉) 만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 복원되어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00여 미터인데 1979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면서 흙으로 성벽을 돋우어 놓아 오늘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대개 3∼5m 정도이며 붕괴가 심해서 정확한 축조공법은 알 수 없으나, 최근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1차 발굴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보고서가 나오면 대략적인 구조는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성 안쪽으로는 북쪽에 성문지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고 남쪽 성벽의 중간에도 원래 성문지로 보이는 흔적이 있었으나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 자리에 흙을 메워 지금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 한다.
보수공사가 오히려 문화재 훼손 공사가 된 셈이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최근에 발굴조사를 하는 현장에서 신라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 곳이 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시대를 신라 말기 이전으로 훨씬 올려 잡을 근거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지방은 교통이 발달한 곳이어서 일찍부터 중요시되었던 곳으로 이 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즉, 1232년(고종 19) 몽고의 제 2차 침입 때 몽고장수 살리타이(撒禮塔)가 처인성을 공격하자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가 승군을 이끌고 항전하여 살리타이를 화살로 쏘아 죽이자 지휘관을 잃은 몽고병이 패전, 퇴각하였다는 대첩 기록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육로의 요충지인 이 곳 처인(處仁)에 주둔한 왜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수원의 독산성(禿山城)에 집결한 관군의 대부대가 처인을 공격하여 탈환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같이 이 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하는 대첩 기록과 오늘날 사적으로 지정된 현장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뭔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것은 바로 지금의 처인성(處仁城)이 가지는 규모가 대첩의 현장으로 보기에는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하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