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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로 돋보이는 명문가

용인신문 기자  2001.01.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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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18) -해주오씨 일가 묘역2

이들 묘역에서 약간 떨어진 북쪽 산기슭에는 오윤겸의 동생인 오윤해(吳允諧 1562∼?)와 그의 아들 오달제(吳達濟 1609∼1637)의 묘가 있다. 오윤해의 자는 여화(汝和), 호는 만운(晩雲)이며 희문(希文)의 아들로 큰아버지인 희인(希仁)에게 자식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다. 1610년(광해군 14)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 돈녕부 도정, 여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백성을 위한 선정을 많이 펴 칭송을 받았으나, 1636년(선조 14)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와 강화가 성립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산중에 은거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오달제(吳達濟)의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으로 지금의 용인시 원삼면 학일리에서 태어났다. 1634년(인조 12)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거쳐 부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1637년 1월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면서 청나라로부터 화의에 반대했던 척화파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심양으로 잡혀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그에게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서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온갖 협박을 가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 하고, 저들의 말을 따르면 곧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그들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였다. 그는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고 하여 그들의 충성과 절개를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효종 때에 이르러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와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유해가 수습되지 못하여 묘(墓)가 없었으나, 후에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허리띠(帶)와 주머니(囊)를 두 부인의 묘 뒤에 묻고 허묘(虛墓)를 만들었다. 그의 묘에는 아무런 석물도 없고 다만 입구에 신도비와 같은 형식의 대낭장비(帶囊葬碑)가 있는데, 글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 짓고 글씨는 김사목(金思穆)이 썼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만고의 충신 포은(圃隱) 선생의 넋이 잠들어 있고, 이 곳에는 우리 용인이 낳은 호국충절의 상징인 선생의 넋이 잠들어 있으니 이 곳 모현면 능원리와 오산리 일대야말로 우리 역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충절의 땅이라 해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 대대로 그의 충절이 담긴 후광을 두루 입었을 해주오씨의 묘역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계절이 바뀐 흔적이 남아있다 사라지고 하건만,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한 후손들의 아픔을 선생께 고해 바치기라도 하듯이 정성스레 묘역을 단장한 흔적에 잔설(殘雪)만 남아 모진 추위를 견뎌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