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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혼이 된 풍운아의 넔

용인신문 기자  2001.01.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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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19) -어비우리(漁肥里)

시내를 빠져나와 이동면 천리(泉里)를 지나 송전(松田)에 들어서니 눈발이 점점 더 거세어 진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안고 돌면서 혹시나 싶어 지나가는 여학생을 붙들고 「어비우리」가 어디냐고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모른다고 고개를 흔든다. 방아리를 지나다가 60대쯤 돼 보이는 어른에게 다시 물었다.
"어비우리는 왜 찾아요? 물 속에 잠긴 지가 언제인데… "
용인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비(魚肥)우리」또는 「어비리(魚肥里)」라고 불리던 마을이 지금의 「이동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지금도 해마다 가뭄으로 저수지 물이 줄어들면 「어비우리」에 있었던 아름드리 고목들이 저수지 수면 위로 어김없이 그 모습을 나타내곤 하여 그 옛날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필자가 「어비우리」를 찾은 것은 이 마을에 얽힌 가슴아픈 근대사의 역사적 사건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해인 을미년(1895년) 음력 섣달 그믐께, 이 「어비우리」마을 입구에 낯선 2인교의 부인용 가마가 나타났다. 가마에는 기름병이니 바가지 등이 잔뜩 매달려 潔底?한 눈에 친정에 다녀오는 여인의 가마임을 알 수 있었다. 가마가 송전을 지나 안성과 용인 땅 경계에 있는 이 마을에 들어서려 할 때쯤 되어 날이 저물었다. 가마가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마을의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가마에서 내린 사람은 뜻밖에도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어슬프게 변색을 했어도 그의 행동에는 무게가 있었고 그를 따라 온 가마꾼들도 모두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이 과객이 저녁상을 물리면서 주모에게 마을 이름이 뭐냐고 묻자, 주모는 「어비(魚肥)우리」라고 대답했다.
주모의 대답을 들은 과객은 마을 이름이 마음에 걸리는 듯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저수지가 생기기 전이어서 마을 이름이 생소했던 것이다. 원래는 냇물이 좋아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어비(魚肥)우리」인데, 이 과객에게는 「어비읍(魚肥泣)」으로 들렸던 것이다. 즉, 살찐 고기가 슬피 운다는 뜻으로 들린 것이다. 과객은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과객의 이름이 바로 어윤중(魚允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으로, 21살 때인 1869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주서로 등용된 후, 승지와 참판을 거치면서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초기 개화정책을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되어 러시아, 청나라와의 협의하여 국경을 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동학난 때에는 선무사(宣撫使)로 파견되었고 드디어 1895년에는 탁지부(度支部) 대신(大臣)이 되어 재정·경제 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특히 조세제도의 개혁은 농민층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켜 농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그런 그가 지금은 탁지부 대신이라는 벼슬을 감추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충북 보은(報恩)으로 가고 있는 중에 날이 저물어 이 마을에 묵게 된 것이었다.
그는 친청파(親淸派)도 아니요 친일파(親日派)도 아니며, 또 보수파도 개혁파도 아니었다. 그는 김윤식(金允植)과 더불어 중도 성향의 정치가로 국민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는 명망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