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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경의 용인이야기<수정분>

김종경 기자  2009.10.23 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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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경의 용인이야기>

용인과 ‘약천 남구만’

용인에서 ‘약천 문학제’가 열렸다. ‘약천(藥泉)’이란 말은 물론 용인과 약천의 연계성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향토사에 관심이 있든 없든 지역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는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조 작가가 바로 조선 후기의 문신인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다. 약천 문학제가 용인에서 열린 이유는 선생이 오랫동안 용인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약천 묘소와 사당(별묘)도 용인에 있고, 의령 남씨 문충공파 후손들도 용인에 많이 살고 있다.
약천문학제를 준비한 ‘용인문학회’는 시를 쓰며 문청을 자처하던 기자가 1996년 지역문인들과 함께 창립한 향토문학단체다. 이후 10년 넘게 ‘용인문학 신인상 공모전’, ‘용인문학 아카데미 시창작반’, ‘용인시 문학의 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지역문학운동을 펼쳐왔다.
그렇지만 기자를 비롯해 지역문인들은 향토문학의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의 뿌리가 있어야 현재와 미래가 있다는 나름대로의 원죄의식 같은 마음을 가졌던 탓일까. 몇 년 동안의 숙고 끝에 약천 남구만 선생을 기리는 문학제를 기획 추진하게 됐다. 다행이 약천 선생 후손들이 적극 후원하였고, 그로인해 약천문학제의 초석이 마련됐다.
올해 행사는 간략하게 두 가지였다. 제1부 ‘약천 남구만 심포지엄’과 제2부 ‘용인시 문학의 밤’이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더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첫 단추는 용인문학회와 의령 남씨 종중에서 끼웠지만, 앞으로는 지역문화예술단체와 인사들도 대거 참여하길 제안한다.
기자는 이번 행사를 통해 다행스러움과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교차했다. 지역사회의 무관심 때문이다. 강원도 동해시 심곡동에서는 이미 ‘약천문화마을’까지 조성해 오래전부터 약천 선생을 기리고 있다. 그 마을은 선생의 귀향지로 고작 1년 여 머물렀던 곳이다. 그럼에도 지자체가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마을 전체를 성역화 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최근엔 다른 지자체도 약천을 기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약천의 정치· 문학적 업적이 재평가 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반면 용인시에는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묘소 외에는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찾아가기조차 힘든 실정이다. 문화재 지정 여부를 떠나 약천이 낙향해 가장 오랫동안 살며 아꼈던 곳 아닌가. 다행히 후손들이 사당과 묘소는 잘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약천이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하던 비파담은 개발 때문에 망가져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그나마도 약천이 살았던 터에 복원된 가옥 때문에 위로를 받았다. 좀 더 보완한다면 ‘약천문학관’으로 써도 손색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기자는 향토문화단체들과 함께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노작 홍사용 생가복원을 위해 지자체에 청원서를 올린바 있었다. 노작은 근대시인 중 유일하게 알려진 용인출생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생가복원은 실패로 끝났다. 반면, 그의 묘소와 후손들이 있는 화성시에서는 ‘노작 문학상’을 제정해 전국 대상의 문학행사를 벌이고 있다.
늦었지만 용인시도 이제라도 약천문학제가 용인의 대표적인 문화축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아까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지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