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魚允中)은 마을 이름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비읍(魚肥泣)이라… 마치 자신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이 곳에서 슬피 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부랴부랴 다시 행장을 갖추고 이 마을을 피해 이웃 동네를 찾아 안관현(安寬鉉)이라는 사람의 사랑채를 빌어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에 대궐에서는 고종황제가 상궁의 가마를 타고 대궐을 탈출하여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이른 바,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이 있었다.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 군대와 낭인(浪人)들을 앞세워 대원군을 등에 업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출범시키자,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이 내각에 참여한 인물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김홍집과 정병하(鄭秉夏)는 살해되어 종로 네거리에 효시되었고 유길준, 조희연(趙羲淵) 등은 체포되어 연행 중에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망명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 탁지부 대신이었던 어윤중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침 낙향 중이었고, 또 평소에 원만한 인품의 중도파라는 점에서 살해 대상에서 일단 제외되었다. 어윤중은 김홍집과 함께 일본측으로부터 망명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는 당시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 남아 있는 것이 여전히 불안하였으므로 고향인 보은(報恩)으로 가기 위해 여인이 타는 가마로 위장하여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 마을에 과객이 묵게 되면 그 과객의 신분을 알기 위해 마을 전체가 술렁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과객이 귀인이거나 높은 벼슬아치일 때 못 알아보고 대접이 소홀했다가는 마을에 후환이 닥칠 것이고, 반대로 이를 잘 대접함으로써 영달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안관현의 사랑채에 든 과객이 탁지부(度支部) 대신(大臣) 어윤중(魚允中)임을 알았다. 이러한 사실은 곧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삽시간에 이웃 마을로 퍼져 나갔다. 마침내 이 사실은 송전(松田)까지 퍼져 그 마을의 정원로(鄭元老)라는 사람의 집에 식객으로 와 있던 유진구(兪鎭九)라는 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 말을 들은 유진구는 귀가 번쩍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이 두 사람의 악연(惡緣)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화기 근대사에서 묻혀버린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사건을 들추어 내지 않을 수 없다. 그 것은 바로, 이들이 「어비우리」에서 다시 마주치기 두 달 전에 있었던 「국모시해 복수 의거 실패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 후인 을미년(1895년) 음력 10월 16일 필동장신(筆洞將臣)인 김기석(金箕錫)의 조카 김재풍(金在豊)이 국모 복수의 의거를 일으켜 경복궁에 침입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김재풍은 시해사건 이전에 탁지부 대신이던 어윤중의 밑에서 사계국장(司計局長)으로 있었다. 의거의 주축은 남촌(南村)에 사는 무인들이었는데 친로파인 이범진 등과 내통하여,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있던 훈련원에 모여 거사계획을 세웠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