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너무 억울해서 포기하지 못해요. 빚없으면 다른 것이라도 해보겠는데 이제와서 뭘하겠어요. 오직 이것 하나로 사는건데…."
지난 21일, 1월 폭설에 이어 이번에 25cm라는 최고 적설량을 보인 모현면에서 시설 채소를 짓는 이정범(45)·박미혜(37)씨 부부.
1600평 규모의 연동 8동의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린 폐허위에서 망연자실 하우스를 바라보는 부부는 "참 열심히 일하며 살았는데 왜 이렇게 당해야 하냐"며 할말을 잊는다. 당초 화훼 하우스로 지은 것이라서 대출에 보조에 평당 7만원씩 지은 보물같은 하우스였다.
"오늘 아침에 군인들이 파견됐는데 채소를 건질수 있는 다른 농가로 보냈어요. 우리는 상추가 몽땅 얼어서 건질것도 없고, 우선 펴서 쓸만한 파이프를 추려낸 후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다."
파이프 하나에 6000원씩 한다며 하나라도 더 건져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오로지 두 부부만이 휘어지고 주저앉은 희망의 터전에 뛰어들어 파이프를 얽어맨 굵은 철사줄을 억척스레 끊어낸다. 비닐도 한동에 19만원씩 3중을 하려면 작은 돈이 아니라며 다시 사용할 요량으로 조심스레 걷어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돈이 있어야 파이프라도 사서 복구라도 하겠는데 돈이 없으니 그저 답답하고 막막할 뿐입니다."
오전에 그나마 쓸만한 파이프를 건지던 이씨는 점심 무렵 집에 들어가서 소주를 걸쳤다. 아내 박씨는 꼼짝도 않고 TV 앞에만 앉아 있다가 두 부부는 서로 왜 그러고만 있냐며 언성을 높였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두 부부는 밤잠도 못자고 두통을 앓는다. 이씨는 하우스가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잊지 못하며 처음 일주일은 몹시 앓고 밥도 못먹었다.
한시도 놀지 않고 땀흘려 일했는데 눈덩이처럼 늘어난 빚에 이자도 연체돼 농협에서 대출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오늘 아침에 연체 때문에 보증 세우고 하우스 긴급 자금 대출 신청을 했는데 절차가 너무 까다롭습니다. 보증을 세워도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데 어찌될지 모르겠어요."
만약 심사에서 통과가 안되면 "두팔로 버텨서라도 짓겠다"는 이씨는 노지 채소를 하더라도 농사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내 박씨는 어느 세월에 노지 채소로 빚 갚겠냐고 혼자말을 한다.
이씨 부부는 사실 이번에 망가져버린 상추에 얼마나 큰 기대를 했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수해다 태풍이다 자연재해 때문에 투자만 계속했을 뿐 수익은 거의 없었어요. 을 못갚았습니다. 명절 전에 상추를 팔면 일부라도 빚을 갚겠더라구요.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이렇게 폭싹 주저앉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설을 앞두고 들떠있던 부부에게 지난 1월 7일 갑작스레 쏟아진 눈은 가혹했다. 그때 무너져 내린 하우스 복구에 손도 못댄채 이번에 또다시 폭설이 덮쳐 하우스는 더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처음엔 장미를 했다. 초기에는 빚도 거의 없고 잘 풀렸는데 94년에 폭설로 하우스가 망가진 후 새로 하우스를 지으면서 대출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 IMF가 닥치고 꽃값이 폭락하면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시설 채소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선뜻 돌리기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변의 격려와 도움으로 99년 10월 용기를 내서 시설채소에 뛰어들어 배추 농사를 지었다가 기름값이 수백만원 들고 기름값도 다 값지 못했다. 지난해 경안천 다리가 넘쳐 급류가 하우스를 망쳐 놓던날은 정성스레 상추 모종을 마친 날이었다. 그후 가까스로 복구를 해서 10월 중순에 상추 모종을 심어 설을 앞두고서 "한번은 기회가 오겠지"하는 희망으로 꽉 차있었다.
유기농법도 배우고 참으로 열심히 일해 누구보다 자신있었는데, 그런데 이번엔 폭설에 치었다.
"워낙 튼튼하게 지었던 하우스라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리 하우스가 제일 늦게 무너졌어요."
눈이 올줄도 몰랐고, 눈을 녹이기 위해 기름 보일러를 긴급 작동시킬 수도 없었다. 지난 여름 수해 때 기름보일러가 물에 잠겨 망가졌다. 설상가상으로 지난달 눈오던 날 정전이 발생해 수막을 작동시키지도 못했다. 이씨 하우스는 특히 화훼를 했던 연동 하우스라 연쇄적으로 넘어가 피해가 더 컸다. 수막이라도 작동시켜 눈을 녹였더라면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텐데….
이씨는 인부 살 돈도 없지만 최대한 자재를 절약하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직접 복구에 나설 생각이다.
"우선 파이프 값이라도 선보조 되면 좋으련만. 세워놓고 나서 융자 나오고 보조로 빚 갚으면 되고, 또 융자도 5년동안 이자 잘 물고 빚 갚아 나가면 될텐데…."
무의식 중에 뱉은 이씨 말. 빚과 이자를 갚아나가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생활인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