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보였을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보였을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을 발설 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
이병률의 시를 이끌어가는 지배소는 이별이다. 사람과의 이별이든 목숨과의 이별이든 독처럼 황홀한 이별이다. 이별의 제의는 다양해서 소실점을 행해 떠나기도 하고 엇갈림을 묵인하거나 만남을 밀어내는 이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별의 언어는 음악이다. 이병률은 이별을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시인인 것이다.
「봉인된 지도」는 우리들 모두의 가슴 깊이 넣어둔 삶의 지형도이다. 이 시편의 지형도는 죽음에 닿아 있는 우울한 지형도이다. 우주의 운행이 느리고 느리어서 일년이 팔백일이었을 때나, 오백일이었을 때나 시적 화자가 지켜야 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이다.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에 이른 것은 지금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인 우주의 운행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느린 죽음의 진화를 견디는 것이 인류이며 무릇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인 것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이 절대의 진화 앞에 소실점은 아득하기는 해도 우리들이 가 닿을 수밖에 없는 지점인 것이다. 죽음이라는 지점 말이다.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