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1753년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각 지방을 돌아본 후 균역법의 실시과정에서 일어나는 폐단을 지적하여 진언하였고 그 간의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1758년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마침, 이 해에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영조(英祖)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英祖)는 선생을 가리켜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正祖)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 후 대사간, 대사헌, 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물러나자, 그 해 윤 5월에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했다.
복상 후 선생은 다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1767년부터 홍문관 제학, 함경도 관찰사, 한성판윤을, 1770년부터는 병조, 예조, 호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영조(英祖)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정조(正祖)가 즉위한 후에 반대파들로부터 참소를 당하여 서울 근교의 명덕산에서 8년 간이나 은거하다가 1788년 정조(正祖)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면서 다시 관직에 나섰는데, 이 때 선생은 황극(皇極)을 세울 것, 당론(黨論)을 없앨 것, 의리?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모두 6개 항의 개혁을 진언하였다. 1790년에 좌의정(左議政)으로서 행정수반이 되었고 1793년에 이르러 영의정(領議政)에 제수되었고 마지막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에 사직했다.
선생의 문장(文章)은 소(疏)와 차(箚)에 능하였고, 시풍(詩風)은 위로는 이민구(李敏求), 허 목(許 穆)을, 아래로는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순조 때, 충남 청양(靑陽)에 선생의 영각(影閣)이 세워졌고, 1965년 충남 부여 관북리에 선생을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번암집(樊巖集) 59권이 전하는데, 책머리에는 정조(正祖)의 친필 어찰과 교지를 수록하였다.
우리 용인에는 선생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선생은 평소 높은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정조(正祖) 역시 학문을 좋아하여 박학다식했기 때문에 선생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전국에 과거령이 내렸다. 전국의 유생(儒生)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는데, 어느 날 남도 선비 한 사람이 과거 길에 용인역(龍仁驛)을 지나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 쉬어 갈 주막을 찾던 이 선비의 눈에 산 능선에 서 있는 묘비석이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비문(碑文)을 읽어보니 임금께서 직접 지어 채제공(蔡濟恭)에게 내린 뇌문비( 文碑)가 아닌가. 선비는 깜짝 놀라 선생의 뇌문비 앞에 넙죽 엎드렸다. 시골에서 공부하면서 채제공(蔡濟恭)에 대한 명성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데다가, 평소 존경해 오던 선생의 묘소를 우연히 찾았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았겠는가.
선비는 경건한 마음으로 큰절을 올리고 꿇어앉아, 서른다섯이나 되도록 번번히 과거에 낙방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선생을 평소 흠모하여 왔으니 자신의 소원을 한 번 풀어 주십사 하고 정성스럽게 빌었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선비는 가까운 주막을 찾아 유숙을 하게 되었다. 먼길을 걸어온 선비는 피곤한 나머지 곧 잠이 들었다. 선비의 태도가 너무 정성스러웠던지 그 날 밤 선비의 꿈에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나타났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