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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사랑한 큰 정치인

용인신문 기자  2001.03.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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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24) -채제공 뇌문비

능선을 오르는 발 아래로 갑자기 뭔가 밟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얼른 옆으로 비껴 선다. 발자국이 찍힌 자리를 자세히 내려다보니 지렁이가 꿈틀대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 새 산비탈 능선 여기 저기에는 벌써 봄맞이가 분주한 모습들이다. 바야흐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동면(冬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햇살이 제법 따사로운 느낌이 든다.
능선을 올라서니 낮은 구릉 위에 잘 정돈된 아담한 묘소가 있고 비각을 등지고 오던 길로 돌아서니 용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곳이 바로 경기도 문화재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채제공(蔡濟恭) 선생 묘(墓)」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채제공(蔡濟恭) 선생 뢰문비( 文碑)」가 있는 역북동 산 5번지 일대로서 이 부근의 마을 이름은 예로부터 「낙원마을」이라 전하고 있다. 약 200여 평에 이르는 선생의 묘역은 장축을 서남향으로 두고 있는데, 장대석의 기단에 상석(床石)과 혼유석(魂遊石), 향로석(香爐石)이 갖추어져 있고 묘역의 양쪽에는 망주석(望柱石), 묘역 앞에는 석양(石羊) 한 쌍이 나란히 정렬하고 있다.
묘소?오르는 입구에 약 2∼3평 정도 규모의 비각이 있고 비각 안에는 「뇌문비( 文碑)」가 있다. 이 비(碑)는 영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 선생의 장례일에 정조(正祖)가 친히 지어 보낸 제문(祭文)을 새긴 것이다. 「뇌문( 文)」이란 죽은 이의 명복을 신에게 비는 글로 제문(祭文)의 일종을 이르는 용어로서 이 비신(碑身)의 머리 부분에 「어제뇌문(御製 文)」이라는 전액(篆額)이 있어서 「뇌문비( 文碑)」라고 부른다. 비신의 재료는 오석(烏石)으로 화강암을 된 직사각형의 비좌(碑座) 위에 세웠고 상단에 팔작지붕형의 옥개를 올려놓았다. 비신의 높이는 144㎝, 너비 54㎝, 두께 29㎝이다.
비문(碑文)은 해서체(楷書體)로 그 내용은 체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의 뜻을 표한 것으로 모두 500여 자가 새겨져 있다. 서두에는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고 하면서 선생을 칭송하였다. 선생의 성품에 대해서는 "그 기개(氣槪)는 엷은 구름과 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라고 하였다. 또, 문장은 "강개하고 청명하여 장주(莊周)의 정을 취한 듯, 열자(列子)의 진액인 듯 하고, 사마천의 골수같고, 반고의 힘줄 같다."라고 격찬하였다.
이어서, 정조(正祖)와 채제공(蔡濟恭)의 친분관계를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정조 스스로 "경(卿)을 알고 경(卿)을 씀에 내 독실하게 믿었노라"라고 하여 선생에 대한 신뢰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다. 끝 부분에서는 "조정에 노성(老成)이 없다면 나라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 소문이 자자하니 경(卿)과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라고 하면서 "500여 마디의 말로서 이 뇌문( 文)을 지었노라"고 자술하고 있다.
이 비문(碑文)의 맨 끝에 「己未三月二十六日」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정조 23년(1799년) 3월 26일에 지어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날은 채제공(蔡濟恭)이 돌아가신 지 67일째 되는 날이다.
채제공(蔡濟恭, 1720(숙종 46)∼1799(정조 23))의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으로 효종(孝宗)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유후(裕後)의 방계 5대 손으로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향시(鄕試)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