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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감상 46 | 꽃살문 | 이정록

용인신문 기자  2010.04.26 20: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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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살문 | 이정록

꽃에는 정작 방년이라는 말이 없다네
그래, 천년만년 꽃다운 얼굴 보여주겠다고
누군가 칼과 붓으로 나를 피워놓았네만
그 붓끝 떨림이며 칼자국 바람에 다 삭혀내야
꽃잎에 나이테 서려 무는 방년 아니겠나?
꽃이란 게, 향과 꿀을 퍼내는 출문이자 열매로 가는 입문이라
나도 고개 돌려 법당 마루에 오체투지하고 싶네만
마른 주둥이 훔치는 햇살 천년 바람 천년,
법당 마당의 싸리비질 자국만 돋을 새김하고 있네
그렇다네, 이 문짝에 염화 없다면
어찌 어둔 법당에 미소 있겠는가?
풍경소리며 목탁소리에도 나이테가 있는 법,
날 쓰다듬고 가는 저 달빛 구름 그림자처럼
씨앗 쪽으로 잘 바래어 가시게나


꽃살문은 법당 문짝에 새겨진 나무 문살무늬이다. 연꽃과 국화꽃 혹은 모란꽃을 조각하는 꽃살문은 도량에 내리는 꽃비이며 해탈의 꽃비이며 깨달음의 서원이다. 시적화자는 꽃살문 자신이다. 그녀에게는 방년의 나이가 없다. 그녀의 시간은 속세의 시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정지된 시간 속의 그녀는 천년만년 방년이며 꽃다운 나이이다. 그러나 그 방년은 붓자국과 칼자국이 바람에 다 삭아야 가능한 것이어서 꽃살문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닫으려면 숱한 세월이 필요한 것이다.

문짝에 염화가 없다면 어둔 법당에 무슨 화엄미소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꽃살문은 그녀를 쓰다듬고 떠나가는 달빛에게 씨앗 쪽으로 가시라고 기원한다. 사족이지만 도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살문을 보유한 도량은 내소사의 꽃살문이다. 채색 되지 않은 꽃살문의 정취는 그윽한 맛을 느끼게 한다.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