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백성사랑한 큰 정치인

용인신문 기자  2001.04.01 00:00:00

기사프린트


향토문화순례(26) -채제공 뇌문비3

꿈속에 나타난 선생은 유생에게 “이 번 과거의 시제는 필경 「화도화(花桃花)」일 것이니라. 이는 곧 목화(木花)를 이르는 말이니 거기에 맞게 글을 잘 지어 올리도록 하라”하고 일러 주었다.
잠에서 깬 선비는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밤의 꿈이 마치 생시인양 너무도 생생하여 다시 채제공(蔡濟恭) 선생의 묘소를 찾아 감사의 절을 올리고 서둘러 다시 과거 길에 올랐다.
이 선비가 과거장에 들어서서 시제를 받아보니 그 날 밤 꿈에 선생이 알려준 대로 바로 그 「화도화(花桃花)」가 아닌가. 다른 선비들은 시제의 뜻을 알지 못하여 모두들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 선비는 선생께서 일러주신 대로 글을 지어 제출하여 비로소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 정조(正祖)는 자신이 친히 내린 시제를 알아맞힌 이 선비를 불러 칭송하자, 이 선비는 자신이 과거 길에 용인역을 지나면서 채제공(蔡濟恭)의 묘에서 일어났던 일을 소상하게 아뢰고, 이는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채제공 선생의 음덕이었음을 고백했다.
이 선비의 고백을 듣고 난 정조(正祖)는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고 하면서 생전 선생을 더욱 잊H 못하여 말하기를 “역시 채제공(蔡濟恭)은 죽은 후에도 그를 당할 수 없구나”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며칠 전 강릉을 다녀오면서 대관령을 오르는 길에 강릉김씨(江陵金氏) 시조(始祖)인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묘소 입구에 있는 한 분묘를 찾아 비문을 보니 그 비문을 지은이가 바로 채제공(蔡濟恭)이었다. 문장이 화려하고 물이 흐르듯 유려하여 과연 선생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선생은 자신의 시대를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로 생각하였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하여 중간 수탈의 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하고 탐관오리의 작폐를 없앰으로써 국가의 재정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이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는 정조(正祖)의 관용과 선생의 온건한 정책으로 인하여 당쟁이 줄어들고 사회적으로 많은 안정을 가지고 왔던 시기였다.
우리는 흔히 일제 식민지배의 쓰라린 아픔을 당하게 된 원인의 하나로 조선 후기의 당쟁(黨爭)을 꼽는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조선 후기의 선비들이었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