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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점검 | 처인성의 본격적인 조명을 앞두고

‘산성’ 역사 기록 세밀한 연구 선행돼야
증보동국문헌비고,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등

박숙현 기자  2010.10.04 11: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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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5일부터 17일까지 제24회 처인성 문화제가 열린다. 그동안 용구문화예술제로 치러진 행사를 이번 행사부터 처인성문화제로 명칭을 변경해 치르게 된다. 특히 이번에는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통해 처인성 대첩 소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고 개발해 처인성의 중요성을 드라마 뮤지컬 등 지역문화 콘텐츠로 적극 개발해 알린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현재 처인성은 그 승첩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위치에 대한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그 작은 평지성에서 싸웠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하는 시민들이 꽤 많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대동여지도 등 문헌상에 산성으로 표시돼 있다는 점이다. 과연 김정호라는 대단한 인물이 만든 지도에도 오류가 있는 것일까. 그가 산성으로 표시한 것은 산성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확인 작업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어떠한 확인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앞으로 처인성 위치에 대한 보다 정확한 확인 절차를 통해 보다 풍부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를 잡기를 바라면서 처인성 전투의 의의 및 위치에 대해 현재까지 제기된 논란 등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현재 처인성은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위치해 있다. 작은 동산같은 평지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산성의 둘레가 400여미터에 이르며 1977년 경기도기념물 44호로 지정됐다. 처인성에서는 고려 고종 19년 몽고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승려 김윤후와 처인부곡민은 몽고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 처인성 전투 당시의 고려 상황
처인성 전투(1232년)가 일어날 당시의 고려는 최씨 무신집권기. 무신정권이 의종 24년(1170)~원종11(1270년)까지 100년간 지속되는 가운데 최씨 무신정권은 1196년 최충헌으로부터 시작해 최우 최항 최의까지 60년간 지속됐다.  무신정권이 시작되면서 고려정부는 정치적 혼란과 민란 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후 최우는 몽골이 수전에 약한 점을 들어 장기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했다.
강화 천도는 표면적으로 장기항전을 내세웠으나, 이는 최씨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한 것이었고, 백성들은 강토에 무방비로 버려지는 상황에 처했다.

▲ 몽고와의 전쟁
몽고와의 전쟁은 고려 고종 18년인 1231년, 징기즈칸이 죽고 왕위에 오른 태종(오고타이)이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이유로 1차 전쟁을 개시하면서 30년간 지속됐다. 1231~1259년까지 6차(총 11회)에 걸쳐 침입, 한반도 전체가 몽고군에 유린되고 피해을 입었다.

 

   

1270년 원종이 개경 환도를 하고 몽고와 강화 맺으면서 몽고와의 전쟁은 끝났고, 삼별초의 대몽항전은 원종 14년인 1273년 종식됐다.
몽병에게 포로, 살육된 자는 헤아릴 수 없으며 몽병이 지나는 곳마다 잿더미가 됐다는 기록은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을 이야기 한다.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이 끝나면서 1세기 동안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 원나라의 정치적인 간섭을 받게된다.

 

▲ 처인성 전투(=몽고의 2차 침입)
몽고 2차 침입의 원인은 고려 정부의 강화도 천도와 1차 침입시 남기고 간 다루가치의 살해였다. 몽고는 고려정부의 이같은 태도를 기존 양국간의 화약 파기 및 몽고에 대한 대결 자세로 받아들였다.
몽고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은 서경 일대에 주둔하면서 강화 정부와 교섭을 벌였다. 복속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것으로 교섭이 결렬되자 살리타이는 한양산성, 광주성에 이어 처인성으로 내려왔다. 이때 다른 부대는 대구까지 침입했으며, 부인사에 보관되던 고려대장경이 불에 탔다.

▲ 처인성 침입 이유
용인은 충주 등 중부 이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다. 살리타이는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공략하고, 다시 한강을 건너 경기도 광주성 전투를 거쳐 용인 처인성에 이르렀다. 몽고는 1차 침입을 제외하곤 중부 이남지역까지 침입했다.
이와 함께 처인성은 식량과 무기가 비축되어 있던 창고성으로 처인 지역민의 입보처로 기능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 처인성 승첩의 의의
몽고 적장 살리타이 사살에 따른 처인성 승리는 고려 조정의 갑작스런 천도와 여러 지역에서의 민란으로 취약해진 강화도 최씨 무신정권이 보다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반몽 정책을 펼쳐나가는 발판이 됐다.
즉, 이후의 대몽 항전 전개에 보다 자신감을 주었고 고려의 대몽 장기 항전이 가능하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조성 된 것이다.
무엇보다 고려의 정규군이나 관리의 지휘에 의존하지 않은 순수한 백성들의 자위적인 항전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처인승첩 외에도 대몽항전 대부분이 백성들의 자위적 항전이었으며, 관의 지휘를 받았더라도 그 주력이 정규군이 아닌 지역 민초들로서, 백성들이 나서서 싸운 점은 대몽항전의 중요한 특성이며, 특히 그 가장 대표적이며 최초의 예가 처인성 승첩이다.
처인성 승첩 등에 따른 대몽 항전의 장기화로 인해 정복 국가인 원나라가 정복국에서 조공을 받는 국가로 국가 시스템을 바꾸게 됨에 따라 고려라는 국가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순간을 면했다고 볼 수 있다.

▲김윤후의 기록  전무
처인부곡의 승리를 이끌어낸 승려 김윤후는 그의 엄청난 활약에 비해 기록이 거의 없다. 처인 및 충주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였음에도 승리와 관련 간략한 기록 외에 이렇다할 기록 이 남아있는 게 없다. 이는 몽고 전쟁 후 원의 지배가 100여년 이어지면서 기록의 기회를 상실한 것이며, 이후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펴면서 김윤후에 대한 기록이 영영 남지 못한 것이다.

▲ 처인성 위치에 관한  의문점 1
문헌상 산성으로 의심되거나 혹은 현재의 성과 차이나는 부분으로, 첫째 증보동국문헌비고 권 26 여지고 14 관방 2 성곽편에 “처인산성은 남쪽 25리에 있는 토축성으로 지금은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음을 들 수 있다. 즉 이 자료에는 산성으로 표기돼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산성으로 표시가 돼 있다. 또 대동지지에 처인고성은 토축으로 둘레가 3리라고 기록이 돼 있다. 현재의 처인성은 둘레 400여미터에 불과해 둘레의 차이가 3배가 난다. 또한 전국유적목록(1971)에도 길이가 800m의 토성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세월이 흘러 무너졌어도 그 정도의 흔적이 남아있었음을 이야기 한다. 처인성이 1977년 경기도기념물 44호로 지정되고, 그후 관방유적 보수 작업에 따라 보수되면서 원형의 상실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 처인성 위치에 관한 의문점 2
현재 알려져 있는 평지성인 처인성에서의 싸움은 독안에 든 쥐의 꼴이라고 보여진다.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와 처인부곡민들이 주변의 산들을 놔두고 둘레 400여미터에 불과한 작은 성으로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전투를 행했을까. 전략과 전술을 모르는 일반인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성에 샘물이 없다는 점은 이곳 처인성이 처인부곡민의 입보처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만약 장기전이 펼쳐졌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와함께 당시의 몽골은 세계를 재패하던 날랜 기마병이다. 상대고도가 15~20미터, 성벽 높이 4.8~6.3미터밖에 안 되는 낮은 구릉에 처인 부곡민이 입보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고려후기의 전투 대부분 산성에서의 입보농성으로 특징지어지고 있은 점에 비춰봤을때 특이한 경우로밖에는 이해될 수 없는데, 과연 이것을 특이한 양상으로만 이해하고 넘어갈 부분인지 의아하다.
물론 문헌에 산성으로 나타나 있어도 현재의 평지성을 지칭한 것일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현재, 산성과 관련해 아무것도 확인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처인성의 향후 과제와 우리의 노력
용인시는 용인600년을 앞두고 처인성 성역화 작업을 할 계획이다. 또한 처인성스토리텔링 등 처인성 조명 작업도 본격화하는 추세다. 그동안 역사의 수면 아래로 침잠돼 있던 처인성이 수면위로 떠올라 찬란한게 빛을 발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그럼에도 대동여지도 등에 산성으로 표시된 점 등에 대한 어떠한 조사 연구 작업도 이뤄지지 않은 채 이뤄진다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 이같은 대단한 조명 작업들은 정확한 발굴 고증 등의 작업 하에 이뤄졌을 때 더욱 빛을 발하고 후손들에게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전수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