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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의 성불을 바라며

용인신문 기자  2001.04.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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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27. 마북리 용화전 미륵입상과 탑재

구성(駒城) 읍내의 좁은 도로를 들어서니 좌우가 분주하다. 벌써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고 표정도 한결 밝아 보인다. 도로변 여기 저기에도 벌써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어 이젠 완연한 봄기운을 느낀다.
구성초등학교를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용화전(龍華殿)이라는 초라한 당집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에 이 석상을 향토문화재로 지정한다는 보도가 있어서 내친 김에 찾아 나선 길이다. 용화전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선정비(善政碑)가 10여 기가 서있고, 용화전 주변에는 탑재(塔材)가 부서진 채로 원형을 잃고 남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용화전이 있는 주위에는 옛날에 용화사(龍華寺)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한다. 그러나, 용화전 앞에서 만난 마을 어른들은 모두 그게 잘못 전해진 얘기라고 귀띔해 주었다. 즉, 용화사라고 하는 절은 이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은 현대그룹연수원의 소유가 된 법화산(法華山)의 깊숙한 계곡에 있었으며, 현재 용화전 옆에 남아 있는 탑재(塔材)도 절이 없어지면서 훼손되어 버려진 것을 마을 주민들이 모아 이 곳에 쌓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석상 어떤 사람은 미륵(彌勒)이라 하기도 하고 장승(長 )이라 하기도 하여 얼마 전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어 왔는데, 우리 고장의 향토사학자인 이인영씨가 이 석상을 조사하면서 「용화전(龍華殿)」이라는 이름에 주목하여 미륵불(彌勒佛)로 간주하고 「마북리(麻北里) 미륵입상(彌勒立像)」이라고 이름을 붙여 기록함으로써 그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석상은 그 조형기법이나 전체적인 형상이 마치 장승이나 벅수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석상을 모신 건물을 용화전(龍華殿)이라고 이름을 붙인 점이나 많은 주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미륵(彌勒)으로 섬겨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일단 이 석상을 미륵(彌勒)으로 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용화전(龍華殿)」이라는 간판이 걸린 당집은 그 동안 너무 낡아서 1980년대 중반에 한 차례 해체 복원하였는데, 일제시대에 찍은 사진자료를 보면 지금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남아 있는 탑재(塔材)는 짙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한 장의 큰 판석(板石) 위에 1층 탑신석을 놓고 그 위로 1층 옥개석, 연화대좌(蓮花臺座)의 상대석과 2개 층의 옥개석, 노반(露盤)을 붙여 하나의 돌로 만든 최상층의 옥 석, 괴석(怪石) 등의 부재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상태이며 총 높이는 약 2.7m이다. 이와 같이 상·하층을 하나로 깎은 수법은 공세리 5층 석탑이나 용천리 5층 석탑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상륜부 노반의 네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모각하였고 그 위에 3단의 받침을 두어 면석에 빗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였는데, 노반에 우주를 새기는 경우는 우리나라의 석탑 가운데 그 유례가 별로 많지 않다.
이 탑재(塔材)는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으며 각 층 옥개석의 다듬은 수법이 약간씩 달라 모두가 하나의 탑재로 생각되므로 언제 이 탑이 만들어졌는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1층 탑신석과 옥개석, 3층 옥개석 등 주요 부분을 중심으로 대략적인 연대를 추정해 보면, 우주의 처리와 처마곡선, 그리고 각 층의 옥개받침 등의 조각수법이 통일신라 석탑(石塔)의 전형적인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판단되므로, 대략 고려(高麗) 초기(初期)에 만들어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느 마을이나 들판을 지나가다가 가끔 돌로 깎아 세운 부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는 이를 미륵(彌勒)이라 부르고 여기에 지성을 드리는 신앙행위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용화전(龍華殿)| 미륵(彌勒)도 바로 이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인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