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駒城) 읍내의 좁은 도로를 들어서니 좌우가 분주하다. 벌써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고 표정도 한결 밝아 보인다. 도로변 여기 저기에도 벌써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어 이젠 완연한 봄기운을 느낀다.
구성초등학교를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용화전(龍華殿)이라는 초라한 당집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에 이 석상을 향토문화재로 지정한다는 보도가 있어서 내친 김에 찾아 나선 길이다. 용화전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선정비(善政碑)가 10여 기가 서있고, 용화전 주변에는 탑재(塔材)가 부서진 채로 원형을 잃고 남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용화전이 있는 주위에는 옛날에 용화사(龍華寺)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한다. 그러나, 용화전 앞에서 만난 마을 어른들은 모두 그게 잘못 전해진 얘기라고 귀띔해 주었다. 즉, 용화사라고 하는 절은 이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은 현대그룹연수원의 소유가 된 법화산(法華山)의 깊숙한 계곡에 있었으며, 현재 용화전 옆에 남아 있는 탑재(塔材)도 절이 없어지면서 훼손되어 버려진 것을 마을 주민들이 모아 이 곳에 쌓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석상 어떤 사람은 미륵(彌勒)이라 하기도 하고 장승(長 )이라 하기도 하여 얼마 전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어 왔는데, 우리 고장의 향토사학자인 이인영씨가 이 석상을 조사하면서 「용화전(龍華殿)」이라는 이름에 주목하여 미륵불(彌勒佛)로 간주하고 「마북리(麻北里) 미륵입상(彌勒立像)」이라고 이름을 붙여 기록함으로써 그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석상은 그 조형기법이나 전체적인 형상이 마치 장승이나 벅수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석상을 모신 건물을 용화전(龍華殿)이라고 이름을 붙인 점이나 많은 주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미륵(彌勒)으로 섬겨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일단 이 석상을 미륵(彌勒)으로 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용화전(龍華殿)」이라는 간판이 걸린 당집은 그 동안 너무 낡아서 1980년대 중반에 한 차례 해체 복원하였는데, 일제시대에 찍은 사진자료를 보면 지금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남아 있는 탑재(塔材)는 짙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한 장의 큰 판석(板石) 위에 1층 탑신석을 놓고 그 위로 1층 옥개석, 연화대좌(蓮花臺座)의 상대석과 2개 층의 옥개석, 노반(露盤)을 붙여 하나의 돌로 만든 최상층의 옥 석, 괴석(怪石) 등의 부재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상태이며 총 높이는 약 2.7m이다. 이와 같이 상·하층을 하나로 깎은 수법은 공세리 5층 석탑이나 용천리 5층 석탑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상륜부 노반의 네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모각하였고 그 위에 3단의 받침을 두어 면석에 빗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였는데, 노반에 우주를 새기는 경우는 우리나라의 석탑 가운데 그 유례가 별로 많지 않다.
이 탑재(塔材)는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으며 각 층 옥개석의 다듬은 수법이 약간씩 달라 모두가 하나의 탑재로 생각되므로 언제 이 탑이 만들어졌는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1층 탑신석과 옥개석, 3층 옥개석 등 주요 부분을 중심으로 대략적인 연대를 추정해 보면, 우주의 처리와 처마곡선, 그리고 각 층의 옥개받침 등의 조각수법이 통일신라 석탑(石塔)의 전형적인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판단되므로, 대략 고려(高麗) 초기(初期)에 만들어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느 마을이나 들판을 지나가다가 가끔 돌로 깎아 세운 부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는 이를 미륵(彌勒)이라 부르고 여기에 지성을 드리는 신앙행위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용화전(龍華殿)| 미륵(彌勒)도 바로 이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인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