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는 1999년에 <처인성, 할미산성, 보개산성 지표조사>를 마쳤고, 2002년에는 <처인성 시굴조사>를 마쳤다. 하지만 최근 옛 문헌들과 증언 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현재의 처인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후 1979년에 남서쪽 성벽 120m, 1980년에 동남북 방면의 성벽 205m를 수축하는 등 성곽 복원공사로 이뤄졌다. 그런데 취재를 통해 옛 문헌과 고령자들의 증언을 분석한 결과 현재의 처인성 위치와 형태가 상당부분 변형 왜곡됐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증보동국문헌비고에는 처인성이 <처인산성>으로, 대동여지도에는 <고산성>으로, 대동지지 역시 <고산성>으로 길이가 무려 3리(약1.32km)다. 또 전국유적목록엔 둘레 800m의 토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처인성은 토성(고도 약70m)으로 둘레가 350~400m에 불과하다.
조사과정에서 설득력 있는 증언들도 확보했고, 또 다른 기록들이 있으나 조만간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쳐 본지에 심층보도 할 계획이다.
중요한 것은 처인성의 실제 위치와 변형의 정도, 그리고 역사기록에 대한 오해석을 바로잡을 단서가 아직까지 많다는 사실이다.
석성산과 할미산성 명칭 논란도 마찬가지다. 이미 필자가 지적한 바도 있지만, 다양한 고지도와 <디지털용인향토문화대전>을 통해 확인된 내용을 근거로 제기하고자 한다.
용인시는 물론 향토사학계조차 보개산(보개산성)을 석성산의 별칭으로, 즉 같은 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최근의 백과사전을 비롯한 모든 자료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디지털용인향토문화대전>에서 송호열(서원대학교 지리교육학과)은 『세종실록지리지』는 물론『대동지지』에서도 “보개산 고성을 속칭 할미성(姑城)이라고 한다.
지형이 험요(險要)하다. 또 직로에 독성(독산산성)을 당기고 좌로 남한산성에 연(連)한다. 주위는 2529척이다”라는 근거를 제시하며 보개산이 지금의 할미성이라고 명칭의 오류를 주장했다.
또 조선 중기에 제작된 『용인현지도읍지』의 고적조(古蹟條)에서도 “보개산성의 석축은 2529척인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寶蓋山城 石築周二千五百二十九尺 今皆頹?)”는 기록을 제시했다.
또한 “석성산 봉수는 동쪽 죽산의 건지산에서 내응하여 북쪽 광주의 천천현으로 보낸다(石城山烽燧 東來應竹山巾之山 北去應廣州穿川峴)”라고 기록, 보개산과 석성산을 가장 명확하게 구분 짓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관련 송호열은 현재의 석성산에서는 허물어진 성곽을 거의 볼 수 없으므로 보개산성은 지금의 할미성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기자 역시 각종 고지도를 확인한 결과 해동여지도(1800년)에는 석성산과 보개산봉으로, 18세기 후반 방안도법에 의해 제작된 <용인>지도에서는 석성산과 보개산성으로, 팔도지도(1785~1800)와 팔도군현지도(1760) 역시 석성산과 보개산성은 별개의 산으로 따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지도에는 보개산성에 봉화대가 표시되어 있고, 현재의 석성산이 할미산성 위치처럼 보인다. 이 또한 전문가들의 명확한 해석과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가장 아이러니 한 것은 최근 만들어진 <디지털용인향토문화대전>조차 필자에 따라 주장과 정의가 제 각각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정확한 논의와 검증과정이 없었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이 가질 않는다.
자칫 기자의 주장과 생각이 잘못됐거나 생뚱맞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의심이 가는 역사기록들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검증과 재논의를 거쳐 혹시 모를 진실의 왜곡만큼은 막아보자는 임장임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