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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통찰과 지혜의 시편들”
세상과의 편안한 화해를 보여준 노년의 심상
꽃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다
어느 청춘이 밝고 다닌 꽃길이었을까
뒤축은 다소곳이 안으로 닳아 있다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대처로 나가는 것이 꿈이었던 꽃 구두
뻔질나게 드나들던 방물장수 입담에
세상물정 모르는 어머니는 따라나섰고
아버지는 마른기침 두어 번에 매듭지어 버렸다
몇 번인가 보따리 싸놓고 어금니를 깨물었지만
죽어서도 오면 아니 된다는 유언장 같은 말이
허공을 맴돌 틈도 없이 와 버렸다
청춘은 그 흔적만으로도 노년을 들뜨게 한다는데
마지막으로 신고 갈 신발 슬며시 신고 싶어진다
어둠이 먼저 신고 간 꽃 구두
캄캄한 골목에 쌓여 보이지 않는 구두
가만히 내려다보는 무겁고 낡은 내 구두
-「꽃 구두」 전문
삶의 연륜 탓일까. 인생은 계절의 순환처럼 돌아오지 않는 법이지만, 세상과의 불화를 온몸을 관통하고도 또 하나의 봄을 맞이한 시인.
최근 고희를 앞둔 김어영 시인이 첫 시집 『청춘이 밝고 간 꽃길』을 상재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순을 훨씬 넘긴 후 용인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 김어영 시인.
그의 첫 시집이 주목 받는 이유는 세상과 화해하는 노년의 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삶의 통찰과 지혜가 빛나는 시편들이 맛깔스럽다는 평이다.
공광규 시인은 “소재와 주제를 통하여 다양하게 보여주는 노년의 심상은 대상과 편안하게 화해하면서 인생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그간 세월을 많이 살아낸 이력으로 사물에서 인생의 곡절과 원리를 비유적 상상력으로 형상해닌 시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철탑 위에 집을 짓던 까치가 / 두리번 거린다 // 빵 부스러기를 물고 가던 개미가 / 두리번 거린다 // 철탑보다 높은 17층 아파트에서 / 입에 빵을 문 내가 바람소리에 / 두리번 거린다 - 「오후 5시」전문
이 작품에서 보듯 시인은 전체적으로 시적 대상인 자연과 섬세한 교감으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김어영 시인은 “누룩에 지에밥을 비벼 아랫목에 고이 묻어 놓고 강산이 몇 번 바뀔 동안에도 시혼(詩魂)의 발효를 위해 끈을 놓지 않겠다”고 말해 앞으로도 왕성한 시작활동이 기대된다.
이번 시집은 용인시 문학창작 지원금을 받아 출판되어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