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천의 발자취 유배문학관, 약천마을
지난 1일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유배문학관이 개관됐다. 모현면 갈담리에 세거성씨를 형성한 의령남씨 문충공파(文忠公派) 종중은 1679년 약천 남구만선생이 유배를 당했던 남해군에 유배문학관 개관에 맞춰 방문했다. 2일에는 동해시에 조성된 약천마을도 방문했다. 그들의 일정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주>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로 유명한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이고 서예가다. 인조 7년(1629)에 출생해 숙종 37년(1711년)에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청렴한 신하로서 경사(經史)에 밝았고 문사(文詞)와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약천선생이 은퇴 후 모현면 파담마을에 낙향하여 살았고, 사후 초부리 하부곡 뒷산에 묘소를 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손들의 세거지가 형성됐다.
# 약천 선생의 발자취 남해유배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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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을 기리는 약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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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남씨 문충공파(文忠公派) 종중들과 기자는 지난 2일 강원도 동해시 심곡동의 ‘심곡약천마을’을 방문했다.
동해시는 약천이 귀향지로 1년 머물던 곳인데 지자체의 엄청난 예산으로 마을 전체를 약천을 기리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동해시에서는 전국시조경창대회 등을 개최, 시조문학의 명소로 알리고 있다. 동해문화원에서는 지난 98년 ‘동해시 망상동 남구만 유적과 기층문화’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 용인시에서는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묘소 외엔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찾아가기조차 힘든 실정이다. 다행히 후손들이 사당과 묘소는 잘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약천이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하던 비파담은 개발 때문에 망가져 있다. 지난해 용인에서 지역문인들을 중심으로 ‘약천 문학제’가 열렸다. 약천이 오랬동안 거주했고 묘소와 사당(별묘)도 있고, 의령 남씨 문충공파 후손들도 용인에 많이 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행사인 셈이다.
동해시 약천사(藥泉祠)는 심곡마을에서 머물다 한양으로 되돌아간 약천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격에 반한 마을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영정을 모시던 곳이다. 약천의 영정을 모신 마을이라 이곳을 ‘영당(影堂)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약천사 앞엔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비가 서 있다. 모현면 초부리 하부곡 마을 묘소 입구에도 같은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비가 있다. 약천마을에서 만난 동해시 공무원은 한 쪽 밭을 가르키며 “재넘어 사래 긴밭”이라고 말했다. 용인의 학자들은 “재넘어 사래 긴밭은 지금까지도 모현면에 지명이 전하는 ‘장사래’를 지칭한다”며 “한자로는 ‘장전평(長田坪)’이라 표기해 시조는 모현면 갈담리 파담에서 지은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지자체간 시조 쟁탈전이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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