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했던 용인시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아온 지난 18년간의 용인신문을 넘겨보았습니다. 1992년 12월 3일자로 발간된 창간호는 세월처럼 누렇게 변했고, 갓 태어난 핏덩이처럼 모든 것이 미숙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첫 울음부터 우렁찼고, 그 기상에 힘입어 어느 새 열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세상 나이 만 18세면 성인의 나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용인신문은 당시 성산신문이란 제호로 창간되었습니다. 배판 12면으로 발간된 창간호 1면에는 용인의 시목인 전나무 숲 사진과 박상돈 시인의 〈횃불〉이라는 축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심장부인 경기도에서/ 등뼈로 자리한 우리 용인군/ 복지 용인 한 가운데 수려히 솟은/ 석성산 봉우리에 깃발 높이 꽂고/ 20만 군민의 염원을 모아/ 숙연한 자세로 횃불 밝혀라.// (…중략…) 비뚤어진 자에게 바른 길을/ 난폭한 자에게 인내의 미덕을/ 땀 흘리는 자에게 희망을/ 외로운 자에게 벗이 되도록/ 아름다운 사연일랑 낱낱이 밝히고 /그늘진 구석구석 환히 비추어라.// 험한 산 고개 진흙탕 길을/ 기꺼이 찾아가는 겸손함으로/ 거치른 파도위에 배를 띄우는 /단호한 용단과 과감성으로 /용인의 성산이여 밝혀든 횃불처럼 /그 열정 영원하라, 그 자취 선명하라
결연한 창간 의지를 심어준 축시에서 보듯 당시 용인군은 인구 20만 명의 전형적인 농촌도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축하의 글을 보내주신 면면을 보니 이미 세상과의 인연을 놓으신 몇몇 분들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용인의 수장은 진용관 용인군수였고, 현재 김학규 시장은 경기도의회 초대의원 자격으로 축하의 글을 보내오셨더군요. 창간호 기사를 보니 <군의회 군정감사>, <추곡수매>, <대통령 선거 용인표밭…> 등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조기교육이 관심사였던 것을 알 수 있는 기사도 눈에 띄었습니다.
색 바랜 신문을 다시 들춰본 이유는 오늘보다는 미래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서 지역언론의 황무지를 일궜던 선배도 많았고, 함께 했던 수많은 기자와 필진, 그리고 무한한 격려와 질책을 아끼지 않았던 애독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문의 논조는 온화함보다 조금은 까칠하고 촌스런 지역신문 느낌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향토애를 물씬 풍기는 따듯한 내용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용인신문이 지방자치역사와 궤를 같이해온 탓인지 현재의 용인발전을 되돌아보면 나름 긍지와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예측했던 뉴미디어 시대가 도래했고, 갈수록 열악해지는 지역언론 환경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섭니다. 점점 발전하는 모습으로 시민공동체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목청을 높여야 했지만, 창간 정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자책을 하게 됩니다.
애독자 여러분! 하지만 창간 18주년을 맞아 또 다시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지역의 공기로써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애독자 여러분들의 뜻을 겸허히 받들겠습니다. 그동안 부족했던 점들은 청소년 시절 겪었던 성장통 쯤으로 혜량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시 한 번 용인신문사 임직원 모두 지난 18년을 지켜주신 애독자들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