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대파 한단에 8000원, 좀 더 굵은 것은 1만원. 제철보다 비싸긴 해도 남도의 싱싱함을 접할 수 있다. 수북이 쌓여있는 벌교 꼬막과 홍합, 꼬막은 1kg에 5000원. 지난 장에 필자가 직접 먹어 봤으니 싱싱함까지 보증할 수 있다. 게다가 각종 농수산물과 공산품, 그리고 먹을거리가 가득한 포장마차까지 없는 게 없다. 명품을 파는 백화점보다야 못하겠지만, 백화점에 없는 것들이 더 많으니 행복한 일 아닌가.
장터 끝자락에서는 큰 가마솥 두 개를 걸어놓고 두부 쑤는 광경이 일품이다. 장작불 대신 가스불이란 것이 맘에 걸리지만 대목 탓인지 하루 물량 예매가 오전에 끝났다. 유독 추웠던 날씨 탓에 옷 파는 큰 누이도, 장뇌삼 파는 강원도 아저씨도 소주나 막걸리 한잔으로 몸을 녹인다. 옆에서 덤으로 얻어먹기도 하고 한 잔 사기도 한다.
온갖 잡곡을 다 파는 용인토박이 명선이는 손님을 기다리며 늘 신문을 보고 있다. 언뜻 필자를 보더니 “친구! 감기 좀 사가라~”며 능청을 떤다. 결석 한번 하지 않는 모범생이다. 학창시절 그렇게 공부했으면, 분명 서울대를 갔을 텐데. 웃자는 이야기지만 맞은 편 오뎅 장사 청년은 날씨 탓을 하며 이따금 결석을 한다. 그래도 인사성이 밝고 서글서글해 좋아 보인다.
구수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가 몽땅 뒤섞인 다문화의 공간. 외국인 노동자들도 눈에 자주 띈다. 주말이면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민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장구경을 나온다. 용인 오일장을 보면서 고향인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방글라데시 등 먼 고향나라 향수를 만끽할 것이다.
필자가 그렁저렁 장날마다 얼치기 장꾼이 되어 배회한지 근 1년이 넘었다. 우선 적잖은 수확이 있었다. 재래시장과 노점상 분위기, 그리고 굵직한 물가동향에 대해서는 웬만한 가정주부보다 더 많이 알지도 모른다. 처음 목적은 그게 아니었지만, 엉뚱하게 용인 오일장 단골손님이 되어 버렸다.
<김종경의 용인이야기>에서 오일장 이야기를 두 번째 꺼낸 이유는 오일장 취재 1부를 마치고자 함이다. 그동안은 용인오일장 풍경을 사진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솔직히 말해 오일장에 대한 그리움의 피가 흘렀는지도 모른다. 용인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집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오일장과의 인연은 40년이 훨씬 넘은 셈이다.
고향인 처인구 운학동 내어둔 마을에서 읍내 장터까지는 20리 길. 처음엔 부모님 등에 업히거나 걸어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소달구지나 자전거 뒤에, 이후 학창시절엔 아버지의 전천후 자가용이었던 경운기까지 타고 다녔으니 적잖은 세월이다.
용인신문에 오일장 이야기를 몇 번 썼더니 알아보는 이들도 꽤 생겼다. 고향이라는 인연 때문이지만 잊혔던 얼굴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오일장은 생계의 공간이다. 서민경제를 가장 잘 가늠할 수 있는 시장경제의 현장이기도 하다.
반면, 기존 재래시장 상인들에겐 우려 반 기대 반의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젠 상생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수백 년 된 전통이니 보존계승 하는게 바람직할 것이다. 오히려 마켓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자연스럽게 소멸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어쨌거나 지난 1년여에 걸친 용인 오일장 취재 1막을 마감한다. 그리고 2막을 계획 중이지만, 아직 1막조차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필자도 모르고 있으니 웃긴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