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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영화를 그리며

용인신문 기자  2001.04.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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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29. 용덕사 1.

용덕사(龍德寺)
장원섭/세중옛돌박물관 학예연구관

천년 고찰(古刹)의 영화(榮華)를 그리며①

천리(泉里)를 겨우 빠져나와 좌회전해서 묵리로 방향을 잡으니 오른쪽으로 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 주변 여기 저기에는 봄을 낚으려는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시원하게 펼쳐진 저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요함을 잃지 않고 있다. 신원CC를 지나자 원삼으로 새로 뚫리는 도로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용덕사(龍德寺) 입구까지 거침없이 한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산과 들은 이미 황금색을 벗어버리고 푸르게 바뀌어 가는데, 성륜산(聖輪山) 산자락 아래 남향으로 자리잡은 용덕사 주변도 벌써 녹음(綠陰)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있다.
용덕사(龍德寺)는 성륜산(聖輪山) 남쪽 기슭의 가파른 산비탈을 깎아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경사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전체적으로 아래, 위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가람을 배치하였다. 윗 부분에는 용굴(龍窟)을 비롯하여 요사와 극락전(極樂殿)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아랫 부분 는 요사와 대웅전(大雄殿), 미륵전(彌勒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덕사 경내에서 서쪽으로 나있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낮은 구릉을 넘으면 완만한 경사면을 고르게 닦았던 공터가 나오는데 이 곳도 역시 건물이 들어서 있던 자리로 주변에는 담장과 축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건물터는 서향(西向)으로 들어섰고 주변에는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용덕사(龍德寺)는 이동면 묵리 성륜산(聖輪山)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로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이다. 1792년에 씌여진 「용덕암창건기(龍德庵創建記)」에 따르면,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이 절을 세우고,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3층석탑과 철인(鐵人) 3위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1792년에 석담선사(石潭禪師)가 중건(重建)하고 1825년과 1884년에 각각 정사스님과 성월스님이 중수(重修)하였다는 기록이 보일 뿐, 그 동안에 있었던 사찰의 내력과 규모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불량전답헌납기(佛糧田畓獻納記)」에 의하면, 이 곳 이동면 일대의 전답(田畓) 대부분이 용덕사의 소유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상당?규모를 가진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여기에는 당시에 용덕사에서 소장하고 있던 불교문화재에 대한 기록도 자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현존하고 있는 문화재는 나한상(羅漢像) 53위와 철인상(鐵人像) 3위 중 2위, 그리고 칠성불(七星佛) 등이 전하고 있다. 이들 유물 중에서 사찰의 창건 때까지 시대를 소급해 볼 수 있는 유물은 없고, 다만 나말여초(羅末麗初) 때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조성했다고 하는 철인상(鐵人像)과 석탑(石塔)의 부재(部材)가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 이르러 1912년에 씌어진 「聖輪山 龍德寺에 屬한 土地 및 諸物品目錄」에는 용덕사의 규모가 법당 3칸과 요사 5칸, 칠성각 1칸과 나한전 1칸이 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 중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최근까지만 해도 고려후기(高麗後期)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가 없어진 석조유희보살좌상(石造遊戱菩薩坐像) 1구가 용굴(龍窟) 안에 전하고 있었으나, 1995년 4월 경에 우리 고장 향토사학자인 이인영(李仁寧) 선생이 다시 이 불상(佛像)을 보고자 용덕사(龍德寺)를 찾았을 때 이미 이 불상(佛像)은 사라지고 대신 모조품으로 바뀌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선생이 이 불상이 도난되기 전에 찍어두었던 필름이 있어 지금도 그 좌상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불상이 사라진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라 하겠으나, 사진으로 그 모습남아 잇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보살유희좌상과 더불어 1964년 조사에서는 소형의 석불좌상이 함께 전해 내려오고 있었으나 이 소형 석물좌상 역시 그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