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李仁寧) 선생이 쓴 「내고장 용인 문화유산총람」에 남아 있는 사진자료를 통해 도난당한 이 석조유희보살좌상(石造遊戱菩薩坐像)을 살펴보면, 마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과 비슷한 자세를 가진 불상으로 머리는 파손되어 없어져 그 형태를 알 수 없으나 목부분에 삼도의 일부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으로 복부 하단까지 앞가슴을 노출시켰다. 가슴 부위의 영락(瓔珞)은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었고 오른손은 오른발 위에 받쳐 세웠으나 손목 부위가 파손되었으며, 왼손은 펴서 다리 위에 가볍게 올려놓은 모습이다.
만개(滿開)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불상은 푸른빛이 감도는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의 뒷면에 광배공(光背空)이 있었다고 하는데, 불상(佛像)의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잃어버린 광배(光背)도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훌륭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유산은 그 것을 아끼고 잘 보존하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이렇게 어이없이 사라지고 파손된 유물을 생각하면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사진자료라도 남아 있어 유물의 대략적인 형태를 알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인 세상이 되었으니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용덕사에 남아 있는 철인상(鐵人像) 2구는 진기(鎭基)와 관련된 사찰문화재로,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유물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철인상의 크기는 각각 45㎝, 48.5㎝로서 1792년(건륭 57, 정조 16)에 작성된 「용인군성륜산굴암용덕암창건기(龍仁郡聖輪山窟巖龍德庵創建記)」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진기(鎭基)를 목적으로 구당(舊唐) 삼층석탑(三層石塔) 철인(鐵人) 3위를 조성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이들 존상(尊像)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누군가를 의미하는 뜻으로 존상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1구는 없어지고 2구만 전하고 있다.
이들 철인상(鐵人像)은 단아한 몸체와 형식적인 팔, 작은 귀에 간단하게 음각(陰刻)으로 처리된 눈썹과 눈, 입 그리고 오똑한 코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전 적으로 조형의 형태가 동자석(童子石)의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연상케 한다.
미륵전(彌勒殿)에는 「천리(泉里)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으로 알려진 미륵불(彌勒佛)이 모셔져 있는데, 이 석불은 원래 적동저수지 부근에 있던 것을 1960년대 초에 저수지 제방 축조공사를 하면서 저수지 입구 왼쪽으로 옮겨 당우(堂宇)를 지어 안치했다가 10여 년 전에 용덕사로 옮겨 미륵전을 짓고 봉안을 했다고 한다. 옮길 때부터 이미 대좌(臺座)는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현재의 사각으로 만든 연화대좌는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불상은 턱 아래와 코 부분은 파손되어 나중에 보수를 했으며 전체적으로 둥그스럼한 얼굴에 눈은 크게 뜨고 있으며 단정하게 다문 입가에는 인자하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나타나 있으며 수인(手印)은 왼손으로 여원인(與願印)을 취하였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만개(滿開)하지 않은 꽃봉우리를 잡고 있다. 손으로 이렇게 꽃봉우리를 잡고 있는 형식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미륵불과 보살상에 많이 나타나는 형식으로, 이 불상 역시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성도(成道)한다고 하는 용화도량(龍華道場)?용화수(龍華樹) 꽃봉우리를 잡고 있는 미륵불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