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은 그동안 처인성의 실제 위치 논란을 다양하게 보도해 왔다. 하지만 용인시 행정당국 뿐만 아니라 지역내 향토사학계 관계자들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본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역사자료를 토대로 처인성의 실제 위치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본지는 그동안 ‘평양역사박물관’에 있는 <처인승첩도>와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각종 고지도, 그리고『한국지명총람』에 나타난 처인성 위치 기록 등을 단독 보도 해왔다.
이를 특종 보도해온 박숙현 기자는 현재 ‘이사주당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고, 희곡 『처인성』과 청소년을 위한 역사만화 『처인성의 위대한 전투』의 작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기획을 통해서는 본지 872호 1면에 단독 보도했던 <처인성 실제 위치 다시 찾아야> 제하의 기사를 후속 보도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만을 가지고는 고려시대의 역사 현장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전문가들과 독자여러분들의 다양한 제보를 기다린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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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인성으로 추정되는 십자봉 정상에서 본 기존의 처인성 |
처인성은 지금으로부터 780여 년 전인 1232년 몽고군과의 전쟁시 치열한 격전의 현장이며 인근 주민들의 입보를 위한 성터였다.
현재 알려져 있는 처인성은 해발 약 70m 정도(상대고도 15~20m)에 둘레 약 350m 에 이르는 작은 평지토성이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 처인부곡민들이 그곳으로 숨어들어 사나운 몽골군과 싸웠을까.
특히 몽골과의 전쟁에서 충주성 전투 역시 승전으로 이끈 명 승장 김윤후가 야트막하고 자그마한 토성으로 부곡민들을 모두 숨으라고 독려 했을까. 그냥 단순무식한 상식으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용인신문은 지난 1990년대 말부터 처인성이 산성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대동여지도 의 ‘고산성’ 표시를 근거로 한 주장이었고, 최근 872호(2011년 6월6일자)에서는 한국지명총람의 자료를 근거로 해발 238.9m의 산성임을 주장했다.
실제 본지 취재팀이 현장을 확인한 결과, 한국지명총람에 나온 것처럼 남사면 아곡리, 북리, 완장리 경계지점의 ‘십자봉’ 정상 부근은 한눈에 봐도 천혜의 요세다. 이곳은 이미 취재팀이 세 차례 이상을 답사하며, 처인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왔던 곳이기도 하다.
김정호 대동여지도에도 고산성으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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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역사박물관에 있는 처인승첩도. 서지학 고 이종학(초대 독도박물관장)선생이 평양에서 직접 찍어와 생전에 본지에 제공했던 사진. |
처인성 답사 도중 만난 마을 노인들은 현재의 처인성은 지난 1970년대에 중장비를 동원해 돋워졌음을 증언했다.
“납작했었지. 전체적으로 작고 평평했던 것을 끌어 올린거야.”
실제 『한국의 성곽과 봉수』(1991년 간)에는 “1977년 10월 12일 경기도지방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후 남쪽부분의 성곽 205m를 수축했다. 1979년 남서쪽 성벽 120m를 복원했고, 1980년에 동남북 방면의 성벽 205m를 수축했다. 성곽 복원공사 자문은 고 이선근 박사가 했고, 그가 이 성이 백제 때에 축성된 것이라고 확인한 기록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위의 내용처럼 처인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경기도지방기념물로 지정되는 데는 1976년 동아일보 기사와 칼럼이 일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아일보는 ‘역사의 고전장(古戰場)’이라는 연재물(1976년 10월 7일자) 기사에 김윤후 승장에 의한 처인성 승리를 보도하면서 현재의 처인성을 “아곡마을 초입에 넓이 1정7단, 길이 400여m의 야트막한 토성이 퇴락한 채 흔적을 남기고 있다. …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 이 기사가 나간 2개월 후에 ‘기념비 하나 없는 전적지의 현지고발’(1976년 12월 17일)이라는 칼럼을 통해 관리를 촉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호국정신을 일깨운다는 명목으로 전국적으로 국가차원에서 충절의 인물과 역사를 발굴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처인성은 이 기사가 나간 이듬해인 1977년 10월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는 현재의 처인성과 형제봉이 같은 높이였다는 노인들의 증언과 마을의 전설도 싣고 있어 주목된다. 즉 옛날에는 현재의 처인성 자리가 형제봉과 높이가 같았다는 것. 문제는 현재의 처인성이 형제봉의 일환이있다면 당초부터 평지토성인 현재의 처인성이 실제 처인성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1976년 동아일보 보도후 도 기념물 지정
처인성은 조선시대와 그 후 근대의 기록 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산성으로 표시돼 있거나 표기됐다. 즉, 증보동국문헌비고에 처인산성이라고 표기돼 있고, 대동여지도에 고산성으로 표시돼 있다.
또한 성의 길이도 대동지지에 토축 3리라고 표기돼 있다.(*전국유적목록(1971)에는 토축으로 길이 800m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음)
그러나 근대부터 현재의 평지성의 규모로 축소 기록되고 있다. 일제시대 때 근대적 방법으로 최초 조사돼 1942년 발간된 조선보물 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성벽의 높이가 2.7~3.6m의 토루이고 둘레가 432m에 가깝다”고 기록돼 있다.
처인성 답사 도중 만난 마을 노인들은 현재의 처인성은 지난 1970년대에 중장비를 동원해 돋워졌음을 증언했다. “납작했었지. 전체적으로 작고 평평했던 것을 끌어 올린거야.” 실제 『한국의 성곽과 봉수』(1991년 간)에는 “1977년 10월 12일 경기도지방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후 남쪽부분의 성곽 205m를 수축했다. 1979년 남서쪽 성벽 120m를 복원했고, 1980년에 동남북 방면의 성벽 205m를 수축했다.
성곽 복원공사 자문은 고 이선근 박사가 했고, 그가 이 성이 백제 때에 축성된 것이라고 확인한 기록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위의 내용처럼 처인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경기도지방기념물로 지정되는 데는 1976년 동아일보 기사와 칼럼이 일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아일보는 ‘역사의 고전장(古戰場)’이라는 연재물(1976년 10월 7일자) 기사에 김윤후 승장에 의한 처인성 승리를 보도하면서 현재의 처인성을 “아곡마을 초입에 넓이 1정7단, 길이 400여m의 야트막한 토성이 퇴락한 채 흔적을 남기고 있다. …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 이 기사가 나간 2개월 후에 ‘기념비 하나 없는 전적지의 현지고발’(1976년 12월 17일)이라는 칼럼을 통해 관리를 촉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호국정신을 일깨운다는 명목으로 전국적으로 국가차원에서 충절의 인물과 역사를 발굴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처인성은 이 기사가 나간 이듬해인 1977년 10월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는 현재의 처인성과 형제봉이 같은 높이였다는 노인들의 증언과 마을의 전설도 싣고 있어 주목된다. 즉 옛날에는 현재의 처인성 자리가 형제봉과 높이가 같았다는 것. 문제는 현재의 처인성이 형제봉의 일환이있다면 당초부터 평지토성인 현재의 처인성이 실제 처인성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처인성은 조선시대와 그 후 근대의 기록 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산성으로 표시돼 있거나 표기됐다. 즉, 증보동국문헌비고에 처인산성이라고 표기돼 있고, 대동여지도에 고산성으로 표시돼 있다. 또한 성의 길이도 대동지지에 토축 3리라고 표기돼 있다.(*전국유적목록(1971)에는 토축으로 길이 800m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음) 그러나 근대부터 현재의 평지성의 규모로 축소 기록되고 있다. 일제시대 때 근대적 방법으로 최초 조사돼 1942년 발간된 조선보물 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성벽의 높이가 2.7~3.6m의 토루이고 둘레가 432m에 가깝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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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인성으로 추정되는 십자봉 정상에서는 아곡리, 북리, 완장리 경계지역으로 사방이 시야에 들어온다. |
그 후 문화유적총람(1977)을 비롯 경기도백제문화유적(1986), 한국의 성곽과 봉수(1991)에도 대체로 같은 내용이 답습되고 있다. 동아일보 기사 역시 고적조사자료 기록을 근거로 작성돼 현재의 처인성으로 굳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외형상의 지형에서도 의구심이 든다. 현재 처인성 북서쪽 성벽 옆에 농로가 지나고 그 옆으로 밭이 조성돼 있으나 원래는 현재의 처인성이 고도 100여m의 형제봉과 이어지는 형제봉 능선의 끝자락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처인성 옆에서 농토를 경작하고 있는 남사면 아곡리 주민 한규석 옹(83)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곳은 현재처럼 농토였다”고 말했다.
이를 근거로 보자면 기존의 처인성과 형제봉 사이의 농지는 일제시대를 전후해 농지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처인성 옆에 있는 주택과 축사 등은 현대에 들어 지어진 건축물이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처인성은 1970년대에 거의 새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942년 조사된 모습과도 다른셈이다. 현재의 처인성이 실제 위치라 한다해도 애당초 처인성은 옆에 있는 형제봉의 자락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결국 실제 처인성은 형제봉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