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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위치 “의혹은 밝혀내야 한다”

기획처인성의 실체를 찾아서 ②

박숙현 기자  2011.06.20 10: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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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이 산성일 경우 대부분 의문점 해소
역사 왜곡 고집하는 ‘우’ 범하지 말아야

 

   

용인신문은 그동안 처인성의 실제 위치 논란을 다양하게 보도해 왔다. 하지만 용인시 행정당국 뿐만 아니라 지역내 향토사학계 관계자들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본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역사자료를 토대로 처인성의 실제 위치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본지는 그동안 ‘평양역사박물관’에 있는 <처인승첩도>와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각종 고지도, 그리고『한국지명총람』에 나타난 처인성 위치 기록 등을 단독 보도 해왔다.
이를 특종 보도해온 박숙현 선임기자는 현재 ‘이사주당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고, 희곡 『처인성』과 청소년을 위한 역사만화 『처인성의 위대한 전투』의 작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기획을 통해서는 본지 872호 1면에 단독 보도했던 <처인성 실제 위치 다시 찾아야> 제하의 기사를 후속 보도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만을 가지고는 고려시대의 역사 현장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전문가들과 독자여러분들의 다양한 제보를 기다린다.
<편집자 주>

 

 

   

처인성은 학자들에게 조차도 의문을 남기는 측면이 있다.
1998년 용인에서 열린 ‘고려시대의 용인’ 학술대회 발제문에서 충북대 차용걸 교수는 ‘처인성터의 구조와 성격’이라는 주제문을 발표하면서 처인성이 산성이어야 설명되는 부분들이 몇가지 있음을 이야기 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의 평지성을 처인성으로 인정하면서 발제를 이어갔다.
첫 번째 의문점으로는 △전쟁 시 마을 뒷산이나 멀지 않은 곳의 산성 입보가 일반적 양상이고, 대부분 이민족 침입의 경우 산성에서의 항쟁이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차 교수는 발표 논문에서 “오늘날 처인성터에 대해 그간 면밀한 조사와 고찰이 진행되지 못한 채 몽고족의 침입과 관련한 승첩이 있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 뒤 “전쟁이 일어나면 피란하는 곳은 일반적으로 각 고을의 뒷산이나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산성이 이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이민족이 침입해 오면 항쟁했던 성들이 거의 산성이 위주가 되었음이 보통”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직 이 처인성에서 승리를 거둔 이유와 그때 활약한 인물들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 그저 평면적 역사기술에 의존해 이해하는 피상적 역사인식에 머물러 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현재의 평지성에 대한 예외적 현상을 이야기 하는 첫 번째 부분이다.
둘째 △처인성은 창성으로서 군창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군창은 산성에 있는 것이 보통이라는 점에서 의문점으로 제기하고 있다.
차교수는 발제문에서 “처인성은 창성이었다. 조선 초기 기록에 분명히 이 성에 군창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군창은 산성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처인성처럼 존재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이 성안에 있었던 창고의 규모가 얼마만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군창이 성안에 있고, 이 창고와 창고내의 저장된 군량과 병기를 지키는 성벽이 곧 처인성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결국 차 교수는 평지성인 처인성에 창성이 존재함이 예외라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셋째 △현재의 처인성 서북방의 산줄기 아래 백현원 절터가 있었고, 김윤후 승장이 처인성에 숨어있었다는 점이다.
고려사절요에도 나와 있듯 김윤후는 처인성에 피란해 있었다. 즉 “병란을 피해 성(처인성)에 피난해 있던 스님이 하나가 있다가 살리타이를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
본지 872호(6월5일자) 1면에서 용인신문 취재팀은 현재 처인성의 서북방향의 십자봉 정상 부근을 처인산성으로 추정했다. (한국지명총람에 처인성은 완장리, 북리, 아곡리 3개리 경계의 238.9미터에 이른다고 명시) 용인신문은 백현원이 십자봉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김윤후와 처인부곡민들은 아곡마을 뒷산인 바로 이 십자봉 부근의 산성으로 입보했을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차 교수는 “몽고군과의 싸움에 나타난 처인성은 인근 주민의 입보를 위한 성터였음을 알려 준다. 김윤후는 백현원에 있던 승려로서 이 성에 ‘避兵在城中’(고려사절요), 혹은 ‘避亂于處仁城’(고려사)하고 있었다. 백현원은 이곳의 현재 주민들 이야기로는 처인성 서북방의 산줄기 아래에 절터가 있다고 하므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여겨지며, 동시에 처인성 주변의 백성들은 김윤후의 경우처럼 처인성으로 피란하여 있었다고 여겨진다”고 했다.

지금까지 차 교수는 평지성인 처인성이 갖는 의문점들을 예외적인 경우로 인정하고 있으나 처인산성일 경우에는 일시에 이 모든 궁금증과 의문들이 해소된다.
그러나 차교수는 “우리나라는 산성 위주의 전술이 이미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발달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리를 십분 이용한 축성이 많았다”고 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읍성은 행정의 중심지에 축조된 것이고 전쟁이 일어나면 산성으로 입보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나 읍성의 경우에도 입보가 이뤄지고 전투를 수행했던 좋은 예가 바로 처인성이라고 여겨진다”고 결론 맺고 있다.
또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성에서의 농성과 같은 방어전략이 전통이라 믿어온 터이므로 처인성과 같은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에서의 승리가 믿어지지 않는 면이 있을 수 있다. 처인성은 토축의 읍성으로서 규모도 일반 군현의 것들보다 작다. 처인성은 이러한 단순한 역사적 상상을 뛰어넘는 역사의 현장이다”고 하여 현재 처인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를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처인성 전투가 있은 지 78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곡리 일대 지형의 변화가 상당히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산성전투는 상식적인 것 같다.
처인성 바로 인근의 관방산성들만 보더라도 왜 처인성만 평지성이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더욱 갖지 않을 수 없다. 처인성은 변방의 방비를 위해 설치한 요새로서 기능하지 않았을까. 용인의 할미산성, 보개산성을 비롯해 오산 독산성, 성남 남한산성, 안성 죽주산성, 화성, 평택 등지의 산성들을 보면 그러하다.
용인 600년이 3년여 앞이다.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물에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하나를 해도 진실을 토대로 제대로 해야 한다. 앞으로 영원토록 이어내려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용인시는 다시 이 일대에 대한 조사 연구를 실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