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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고달사지 처인성 세미나 |
처인성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학술회의가 용인향토문화연구회 주최, 용인시, 용인문화원 후원으로 지난 17일 경기도박물관 교육실에서 있었다.
이날 학술회의는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의 진행으로 홍순석 강남대학교 인문대학장이 기조발제 ‘처인성의 용인향토사적 위상’을 발표했으며, 이어 윤한택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제1주제 ‘고려시기 처인부곡 사회경제 상황의 일단’을 발표했다.
제2주제 ‘대몽항전과 처인성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이재범 경기대학교 교수가, 제 3주제 ‘자료를 통해 본 처인성 승첩에 대한 인식의 추이’는 윤승준 단국대학교 교수가 각각 발표했다.
이어 김성환 용인향토문화연구회 회장(실학박물관)의 진행으로 이어진 종합토론은 지정토론자로 이정호(고려대학교), 김대중(전쟁기념관), 강현모(한남대학교) 교수 등이 나섰으며, 자유토론은 이인영(용인미래포럼), 박숙현(용인신문사), 우상표(용인희망연구소) 등이 했다.
이날 강남대 홍순석 교수는 기조발제에서 “처인성은 사적지보다 정신적 차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한다”며 “위치 비정문제로 인해 처인성종합정비계획이 보류되거나 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며, “단순하게 주차장이나 도로정비 등 주변정비 차원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윤한택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주제발표에서 처인부곡의 인구수를 약2000호 1만여명 이었을 것으로 발표한 데 이어 처인부곡은 태조왕건의 고려 건국에 끝까지 저항했던 곳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재범 경기대 교수는 살례탑 사망 시기가 고려사 등의 12월 기록 외에 원사나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을 근거로 8, 9월 설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광주성전투는 살례탑 사망후 철수 중에 치렀던 전투라고 볼 수 있음을 지적했다.
윤승준 단국대 교수는 구전자료 가운데 석성산과 할미성과 처인성을 동일시 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각 성의 차이를 모를 리 없음에도 이같은 전승이 이뤄지는 것은 현재 처인성 자리가 몽골과의 전투가 벌어진 곳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과 처인성보다 오히려 석성산성이 전투용 산성으로 유력한 입보처로 지목돼 왔기때문으로 풀이했다.
한편 박숙현 용인신문사 회장은 처인성 전투가 일어난 시기와 가장 근접한 고려시대의 기록으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처인소성이라고 기록된 점을 지적, 크기 않은 성으로 기록된 점에 주목했다.
그간 조선시대의 기록 및 지도에 나타난 것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법으로 처인성의 실체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으로 보여 진다. 이날 우상표 용인희망연구소장은 처인성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해야 함을 주장했으며, 이인영 전 문화원장(용인미래포럼)은 백현원에 거주했던 김윤후가 처인성에 온 것은 피난이 아니라 전투를 위한 의지로 해석해야 함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