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구절 가운데 마을을 이루는데는 어짊으로서 아름다움을 삼되 어질지 못한 곳을 택하지 말라(里仁爲美擇不處仁)라는 말이 있다.
옛 용인의 ‘처인’이란 지명이 이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딱이 말할 수 없겠으나 처인이란 지명을 논어의 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연상작용에 따라서는 처인이란 브랜드에 무게가 실려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처인이란 지명이 언제부터 생성되었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지지자료를 보면 “이미 고려 현종때(1010-1031)에도 그렇게 불리워 졌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도 처인이란 지명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국여지승람’에 처인성이 “현(용인현)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토축이었는데 지금은 다 무너져 버렸고 군창(軍倉)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몽고의 원정군 사령관 살리타이가 일개 승병에 의하여 격살되었고 그로 인하여 몽고 2차 침입을 종식시키는 대 서사시가 연출되었다.
단 한 개의 화살이 세계를 제패한 몽골대제국 동정군(東征軍) 사령관을 전사시켰다는 사실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비견되고도 남을만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견강부회하자면 고려 관원 설신이 살리타이에게 “이국대관으로서 남강(한강)을 건너는 것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다”고 충고를 했고 택불처인 이라는 공자님 말씀이 있음에도 이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던 살리타이가 이곳에서 비명횡사 한 것은 마치 현덕의 군사(軍師)봉추(鳳雛)가 낙봉파(落鳳破)에서 횡사했다는 고사처럼 살리타이에게 있어서 이곳 처인은 결코 어질지 못했던 땅이었다.
한말에 조사된 지지자료를 보면 ‘현내면에 처인성이 있다. 토축인데 옛태종 8년(1408) 명나라 장수 설청이와서 이곳을 찾아 보았음’(縣內面 處仁城 土築 舊太宗八年明將薛淸來尋)이라는 짧막한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당시 한반도 전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명나라 장수가 이곳 현장을 답사하고 돌아갔던 모양이다. 그 후 1993년 4월 몽골 사회과학원 수미야바타르교수가 현장을 돌아본 일도 있다.
우리지역에 간직된 역사유적에 관해서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 보면서 그것을 가꾸고 자랑거리로 만들어 간다면 이것이야말로 지역적 특성으로 자리매김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역설적으로 보잘 것 없다는 그 곳 정황이 세계사적 이벤트를 연출한 곳이라는 것이 경이롭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