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경 기자 2012.05.14 15:38:45
청진(聽診)의 기억
누가, 두 귀를 잘라 걸어놓았을까
유리창 너머 금속성의 귀
노을을 흘리며 허공을 듣고 있는 청진기였다
의료에 쓰이기보다 헤드셋에 가까운
당신을 듣기 위해 항상 열어두었던 내 귀
채집된 음을 기억의 서랍 속에 숨겨놓은 날이 길다
귀는 깊어 슬픈 기관일 거라는 문장
(……중략……)
청진, 듣는 것으로 보다
모든 병은 마음이 몸에게 보내는 안부
말더듬이를 앓는 건 그가 아니라 마음이었으므로
말에 지칠 때마다
당신은 구름이 잘 들리는 내 방 창문을 두드렸다
문장 읽기를 하다 당신의 가슴에 귀를 묻으면
금세 꿈꾸는 숨소리, 차라리 음악이었고
어느 의사가 병명을 알 수 없는 환자가 안타까워 체내의 음에 귀 기울인 데서 시작되었다는 청진의 기원
이제 당신은 멀리 있고
청진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므로
두 귀는 고요한 서랍이다
그때의 구름만 내재율로 흐르는 창
![]() |
||
흔한 자연의 소재들을 엮어 한편의 연작시처럼 세밀하게 그려낸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인은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왕성한 작품 발표 활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세련된 이미지의 진술로 평범하게만 보이던 자연을 다정하게, 하지만 정결하게 거침없이 경작해 내 놓은 첫 결실이다.
난독의 시대에 멀어져만 가는 독자들을 사로잡는 시인의 다정한 부름에 귀 기울여 본다.
꽃을 잃어버린 나무는 서둘러 푸른 잎들을 틔운다/ 잎은 꽃에게로 열린 나무의 귀 (중략) /착란의 봄이 꽃을 따라가면/ 남겨진 나무의 계절이란 꽃 진 자리의 허공을 견디는 일/ 귀는 한 목소리를 가진 말들로 붐비고/ 나무의 난청은 꽃에게서 와서 꽃에게로 가는 중이다(중략) 길을 잃어버린 그해 꽃이 다시 들려올까/ 몇 잎의 귀를 떨어뜨리며 묻는 나무에게/ 추운 바람을 빌어 잎들을 거둘 뿐이다/ 언제가 난청의 소원이 이뤄질 때
―「꽃은 나무의 난청이다」 부분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자연을 다룬 이은규 시의 중요한 특징은 듣기 때문에 세팅되는 관계와 운동을 대상물 대신 늘 시의 중심에 둔다”며 “꽃이 바람이 구름이 나무가 초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밀교가 그 중심에 놓인다는 것”이라고 평했다. 그는 또 “달리 말해 그는 그 관계의 밀어를 시로 발설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시인은 “옛날 인간에게 노래가 없던 시절/ 하늘에 있는 나무의 씨앗을 훔친 죄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시를 얻게 되었다는 한 부족의 신화/ 내 안의 시에게 첫 노래를 전한다”며 시인의 서문을 대신했다.
1978년 서울에서 출생한 후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이은규 시인은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과 2008년 《동아일보》 시 부문에 당선됐다.
현재 계간 『시와 시』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지난 4월 《시로 여는 세상》제1회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문학동네. 140쪽.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