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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하마" 왕릉설 뒷받침

용인신문 기자  2001.07.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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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설을 본사가 가장 최초로 접수한 것은 지난 1999년으로 박용익 향토문화지킴이 시민모임 대표가 1900년대 초 용인군지에 실린 일본인들의 기록에 근거한 신빙성 있는 주장을 제시하면서 부터였다.
본사가 접수하기 한해 전인 98년에 박 대표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장철수(민속학)를 대동하고 왕릉 답사에 나섰으나 산기슭에서 짚차가 넘어지는 바람에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왔다.
박 대표는 당시 한 동네 노인은 이들이 견인차 등을 동원하는 소동을 대하면서 개인하마(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인데 차를 타고 올라갔으니 차가 도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혀를 찼다고 하며 동네에서는 이미 왕릉이 있다는 설이 돌고 있었다고 당시 본 기자에게 말했다.
이번에 왕릉이 아닌, 희귀석물 묘역 답사에 대동한 박 대표는 근처에 왕릉이 있다고 다시 한번 밝히면서 희귀석물 묘역과 왕릉은 별도의 무덤으로 주장했다. 그는 당시 희귀석물 등 몇점은 고려시대 석물로 추정되지만 문인석은 조선초의 것으로 보인다며 고려말부터 조선초의 것으로 추정했으며, 곧바로 인근의 왕릉을 찾아 나설 뜻을 비쳤다.
그는 또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에 근거해 희귀석물 묘역은 행자능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실제 내려오는 길에 그 마을에서 집안 대대로 400년을 살았다는 전주이씨 후손으로부터 행자능으로 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와함께 박 대표는 행자능이 도굴 당한 것이 아니라 이장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전했다. 당시 정권에 반역한 사람의 묘로 부관참시 등을 우려해 몰래 이장한 것으로 비석은 가져가고, 나머지 석물은 두고 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행자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용인지역에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기때문에, 원삼면이 과거 충청도 지역 죽산부에 속해있던 지역이라는 점에 유념해 충청 지역의 역사를 더듬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이번 답사 이전인 올해 초 희귀석물과 관련한 또다른 제보자로부터는 왕의 선생의 묘로 불린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시녀묘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번에 기사가 보도되면서 가장 먼저 용인문화원 이인영 원장으로부터 제보가 접수됐다.
이원장은 수년전부터 문화재 관리국이 1960년대말에 발행한 문화유적 총람 조선고적자료 부분의 기록에 남아있는 행자능을 찾기 위해 원삼 일대를 답사했다고 말했다.
찾지 못하던 중 기사를 접육?반드시 이번 묘는 행자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 고려말의 것일 가능성이 높고, 비석과 상석 사이의 판석의 경우도 고려시대의 묘역 형태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또 근처에 넘어져 있는 문인석의 규모가 작은 것은 고려말의 양식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이원장은 또 이 묘역이 행자묘일 가능성과 함께 왕릉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기록에 근거해 봉분의 크기와 각종 석물의 종류에 대해서도 밝혔다.
그러나 이인영 원장이 희귀석물 묘역을 답사하지 않은 관계로 이같은 기록에 근거한 자료를 제시한 것일 뿐 실제 희귀석물 묘역을 둘러보면 지역의 협소성 등을 이유로 또다른 지역의 왕릉 주장으로 수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제 3의 설은 지난달 31일 접수됐다.
이 제보자는 희귀석물 묘역 근처에 왕릉이 있으며 두 개가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희귀석물이 왕릉을 신성하게 지켜주는 신하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희귀석물 이마의 구멍은 왕릉의 신성함을 표시하는 것과 더불어 이 묘역이 있는 산세가 풍수지리적으로 말이 누워있는 상으로 주술적 의미에서 묘역 보완의 의미가 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또 희귀석물의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것은 당시 이국인들의 형상을 본뜬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왕릉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특히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쫓겨난 우왕과 창왕의 묘 가운데 창왕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려시대 왕릉이 중국 서안과 개성, 함경도, 황해도, 그리고 남한에 일부 분포하고 있는데 단 두가지 왕릉만 종적이 묘연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80년대 봤던 석물 등으로 미뤄봐 창왕의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