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심훈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감수성 예민한 수재로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수학했다. 여기서 일본인 교사의 식민지 교육에 분노하며 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고, 독립의지를 키웠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탑골공원 독립선언 민중대회에 참여한 뒤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3월 5일 학생들이 중심이 된 남대문역(서울역) 만세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8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집에 얼마동안 머물렀다. 그리하여 절대독립과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대표적 인물인 두 분의 영향으로 강렬한 독립사상을 갖게 됐다.
1923년 귀국한 뒤에는 이를 바탕으로 때로는 실제적으로, 때로는 문학작품을 통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철필구락부에 참여해 일제의 언론탄압을 규탄했고, 융희황제(순종)의 붕어직후 ‘통곡 속에서’라는 시를 발표해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것이다.
특히 광주학생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던 1930년 3·1운동 기념일을 맞이해서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는 민족독립의 ‘그날’을 고대하는 비원을 담은 시로, 항일 저항문학의 최고 금자탑으로 꼽힌다.
나아가 1930년대 초반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운동과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문자보급운동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상록수’라는 농촌계몽 소설을 집필했다. 이를 통해 만주침략 이후 강화된 일제의 농촌통제에 대항한 민족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그리하여 ‘상록수’의 영화화를 추진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상록수’의 단행본 출판에 힘쓰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1936년 9월16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 독립기념관과 서대문 독립공원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9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고, 기념학술 강연도 준비 중이다. 또한 충남 당진에서는 제25회 상록문화제가 10.11∼10.14 까지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