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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공기 자살테러 사건을 접하고

용인신문 기자  2001.09.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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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공기 자살테러 사건을 접하고

<심규홍/본지편집위원>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이며 피뢰침을 발명한 토마스 제퍼슨은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 하였다. 만일 누가 필자에게 묻는다면 <인간은 교리(dogma)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삶의 기준과 지침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준과 지침에 따라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가치관, 인생관, 이념, 사상, 종교 등이 거기에 해당된다. 폴틸리히라는 신학자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의 상태이다. Faith is the state of being ultimately concerned." 이렇듯이 폴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의 영역이 훨씬 넓어진다. 즉, 종교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The Ultimate Concern)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에 심취된 사람이나, 민족주의에 심취된 사람이나, 심지어는 내 주먹만 믿고 산다는 폭력 만능주의자도 틸리히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분명 종교와 다름없다.
그런데 종교라는 단어에는 절대성이 전제되어있다. 따라서 <무엇을 믿는가?>라는 것보다 <어떻게 믿는가?>라는 것이 제 3자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믿음의 양식과 방법이 극단적일 경우 타인들에게 그리고 국가사회와 나아가 인류에게 커다란 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건물과 워싱턴 국방성 건물에 대한 항공기 자살 테러 사건은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필자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인간의 종교성에 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부 이슬람근본주의 자들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미국을 철천지원수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인들을 죽이고 쳐부수는 것을 거룩한 종교행위로 여기고 있다. 세상에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남들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신의 이름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도 있다.
이번 테러사건의 주범들은 사전에 치밀하게 항공기조종훈련을 받고 가미가제 식의 자살테러를 벌여 무고한 사람들을 수 만 명이나 사상케 했다. 아무리 미국의 대외정책이 강압적이고 오만하다하여도 이번 사건의 주범들과 배후 조종자들은 정상적인 사람이라 보기 힘들다. 정말 미쳐도 보통 미친 사람들이 아니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광신적인 신앙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부각시켜주었다.
지구상의 생물들 중에 유독 인간들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가 믿는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고 삶의 용기를 얻는다. 그러나 신앙이 도를 넘으면 남들에게 반드시 피해를 주게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인류를 위해서도 커다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인류역사상 지금까지 벌어진 크고 잔인했던 전쟁은 거의가 다 종교 및 사상전쟁이었다. 불과 수년 전에 대대적인 살육전쟁이 있었던 보스니아 내전도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싸움이었다.
불교도, 기독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 처음에는 모두 짓밟힌 인권의 회복을 위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리가 체계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종교의 본질이 변색되어갔다. 인간보다도 교리가 더 중요해졌다는 이야기다. 거기에는 종교적인 기득권 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에는 이러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배층은 그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죽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열렸던 종교재판이었다. 폭력투쟁으로 기독교를 몰아냈던 공산주의는 하느님의 이름대신 인민?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이것이 바로 인민재판이었다. 과격한 공산주의도 광신적인 종교와 다름없다.
이번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건물과 워싱턴의 국방성건물에 대한 항공기 자살 테러 사건은 광신적인 신앙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 국제적인 광신도들이 출현하는지 집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가적 불평등과 강대국에 의한 착취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울러 그런 불평등과 착취를 빌미로 또 다른 지배층이 형성된다. 그들이 바로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과 아프칸의 탈레반 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5%밖에 안 된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의 50% 이상이 미국에서 소비된다. 특히 중동은 전세계에서 소비되는 대부분의 석유를 공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라크 국민들은 아랍민족주의자인 후세인 때문에 아니, 미국 때문에 아니, 석유 때문에 오히려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기나긴 내전으로 폐허가 되었고 흉작으로 인한 굶주림의 땅이 되어버린 아프카니스탄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아프카니스탄이 라덴이라는 테러후원자를 자국에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미국의 보복공격이 임박해 있다는 것이다. 회교원리주의 탈레반정권 하에 살고있는 아프칸 백성들이나, 아랍민족주의자 후세인의 지배하에 살고 있는 이라크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안으로는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밖으로는 미국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과거 이라크와의 전쟁당시 알라 신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래서 당시 최전선에는 소대장과 함께 종교지도자가 전쟁을 이끌었다.)
유태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살다가 2000년 전에 자신들의 조상이 살았던 곳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다. 미국경제를 움직이는 유태인들 때문에(?) 미국은 늘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해왔다. 테러는 절대 있어서는 안될 지탄받아 마땅한 극악무도한 범죄이다. 그러나 그 원인의 밑바탕에는 미국의 잘못도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