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기반이 튼튼하고,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이 융성해지면 문화가 발전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지난 날 왕조의 성쇠와 흥망에 가장 민감하게 연동되었던 문화중의 하나는 바로 도자기 산업문화이다. 9∼10세기에 발생된 청자문화는 12세기에 이르러 절정기를 이루었고 12세기 중반에서는 상감기법의 청자가 최성기를 이루는데 가히 천하제일의 반 실투성 비색청자는 도공의 혼이 감지되는 전무후무의 명품임에 틀림없으며 이는 무아지경의 도통력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장인정신의 결정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수한 청자문화가 맥을 잇지 못하고 종적을 감춘 것은 무슨 연고였던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겠지만 13세기에 이르러 몽고의 침입과 왕권의 쇠미와 함께 사회 불안정은 중산층을 붕괴시켰고 왕조가 바뀜과 동시에 그 찬란한 고려 청자의 비색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청자산업이 소멸되고 새로운 형태의 자기문화가 태동되었는데 하나는 분청사기의 출현이었다.
분청사기는 청자의 상감기법대신 태토의 기 에 백분을 분장, 인화, 박지(역상감)하는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청자의 대를 이었다.
고려청자가 귀족적이 이었다고 한다면 분청사기는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활달 분방한 기교와 특유의 질박감은 가장 서민적이며 대중적인 문화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6세기 7년여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분청사기 문화도 단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국운의 성쇠와 사회불안정요인이 문화산업에 충격을 가함으로서 문화는 파괴되고 맥이 단절되었는데 한번 훼손된 문화가 다시 회복되려면 몇 세기가 지나야 한다.
그후 생산되기 시작한 조선백자 문화는 광주의 관요를 중심으로 번창하였고 분원요나 금사리 백자의 경지는 고려 청자에 대칭되는 ‘조선백자’의 황홀한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한말의 쇠미와 일제 침략으로 백자문화의 수준은 다시 저급단계로 회귀하였고 그나마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자기 문화산업은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던 것이 저간의 실정이었다.
지금 우리의 이웃 광주·이천·여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자기 엑스포는 가히 청자소멸로부터 9세기 분청소멸로부터 6세기 백자소멸로부터 2세기여 만에 재현된 도자기 문화의 축제라고 할 때, 국운 융성기에 자기 산업이 발전했듯이 畸?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국력과 사회가 안정된 문화융성기로서 우리세대가 그것을 이룩하였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 싶다.
다시 말하면 청자·분청·백자의 재현은 왕조의 성쇠로 단절된 문화의 회복이요 전통의 복원인 동시에 우리 나라 도자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 본 축제에 심장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경기도가 개발한 세계도자기 엑스포는 성공적인 이벤트였다고 여겨지며 이를 계기로 도예문화를 더욱 성숙시킬 수 있는 엑스포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 용인 명성 빠진 엑스포
그러나 청자 발생시기와 거의 같은 시대에 발생되었다고 여겨지는 고려백자의 원류지가 용인임이 분명함에도 용인의 옛 명성으로 메워진 전시공간이 없었던 것에 대하여 아쉬운 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광주 엑스포 전시관 현대 도예작가 전시관을 돌아보았을 때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백자의 각병과 항아리(호) 하나가 있었다.
언 듯 보아도 순도 높은 설백의 고고함이 돋보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용인의 백봉리 가마에서 구워낸 익요의 작품이었다. 거기 전시된 어떤 작가의 작품과 견주어도 이를 압권할 수 있는 인의 작품이었기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으나 네임카드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나서 실망감을 감 출 수 없었다. 거기에는 용인의 명칭이 빠진 채 “서울 도자미술 연구소 한○○”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익요는 분명히 용인 백봉리에 소재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그곳에서 만들었음에도 ‘용인익요’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다.
고려 백자의 명맥이 백봉리에서 재현되었다는 자부심과 그 명성을 용인시민에게 심어줄 수도 있었던 기회를 작가는 왜 외면해 버리고 말았는가? 하는 점에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다.지난 역사를 통틀어 본 거창한 도자문화축제의 의미를 접어두고서 어떤 작가의 작품보다 아무리 탁월한 경지가 돋보였다 하더라도 용인명칭을 누락시켰다는 것, 이 점만은 영 뒷맛이 개운치 않았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