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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에 평생 바쳐

용인신문 기자  2001.10.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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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농 유근의 생애와 민족운동>

유근은 1861년 9월 26일 경기도 용인 양지군 주서면(陽智郡 朱西面, 현재 용인시 동부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가 최근까지 용인 南洞(또는 南里)로 알려졌으나, 이는 그의 친척이며 동명이인인 柳瑾(1861년 7월∼?)의 착오로 밝혀졌다.

김명섭 <강남대/ 단국대 강사·한국사>

석농(石 ) 유근(柳瑾) 선생(1861∼1921)은 구한말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이며 동아일보 창간의 주역으로 한국 언론사를 이끌고,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에서 애국계몽활동을 펼쳤다. 실로 유근 선생은 민족언론과 애국계몽,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춘 선각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민족운동을 조명한 학술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그가 남긴 수많은 글과 역사(役事)는 1차 자료조차 수습하지 못한 실정이다. 이같은 현실은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장지연·박은식·김교헌 등 민족지도자와 비교하여 현격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유근은 1861년 9월 26일 경기도 용인 양지군 주서면(陽智郡 朱西面, 현재 용인시 동부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가 최근까지 용인 南洞(또는 南里)?알려졌으나, 이는 그의 친척이며 동명이인인 柳瑾(1861년 7월∼?)의 착오로 밝혀졌다. 즉 전주 유씨 족보와 호적등본 등으로 이 사실이 확인되었다(이는 용인향토문화지킴이모임 박용익 회장의 끈질긴 조사로 이루어졌다). 족보에 의하면,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아버지 유최근(柳最根)과 경주 김씨(貞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경집(敬集)이며 호는 석농(石 )이다. 그의 아버지 유최근은 수릉참봉(綏陵參奉)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근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문장에 뛰어나 인근에서 수재로 알려졌다. 그는 자기의 지킬 바에 엄격하였으나, 구김 없이 늘 화평하여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27살까지 한학을 공부하였지만, 일찍 중국서적을 섭렵한 까닭에 근대적 사고와 계몽이념을 수용한 개신 유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유근은 나이 34세가 된 1894년 서울에 올라 온 것으로 알져졌다. 이어 이듬해에 김홍집내각에 참여하기 위해 나아가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년만에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1896년 3월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관직에 연연치 않고 오직 애국계몽과 자주독립에 힘썼으니, 그의 민족운동은 독립협회 활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나이 37세가 된 1897년 9월 19일 독립협회 주최의 토론회에 토론자로 나선 것이다. 이날 토론자는 윤치호·지석영·윤효정 등 독립협회의 핵심멤버들이었다.
유근은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에도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협회연역략(獨立協會沿歷略)’은 이 시기에 그를 부회장 또는 정회장 대리급으로 기록하고 있다. 만민공동회가 정부에 의해 그해 12월 강제 해산 당할 무렵, 그도 400여 명의 회원과 함께 체포되었다. 장지연·박은식과의 만남도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장지연과는 친교가 두터워 서로 언론활동과 교정을 맡아주었으며, 장지연의 셋째아들 재륜(在輪)과 딸 숙희(淑姬)가 결혼하여 사돈지간이 되었다.
유근은 1898년 4월 박은식·장지연·남궁억·정교 등과 함께 신문발행을 결의하고 경성신문사를 인수하였다. 이들은 곧 ‘황성신문’으로 바꾸고 일간지로 발행했다. 유근은 주필, 논설위원에 이어 1907년 9월 17일 제 5대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10년 6월까지 약 3년간 재임했다. 황성신문과 관련한 두드러진 항일활동은 단연 명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장지연과 함께 완성한 일이다. 즉 을사보호 조약 체결에 울분을 느낀 장지연이 술에 취한 채 사설을 쓰다가 쓰러지자, 옆에 있던 유근이 필을 받아 글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는 1906년부터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하였다. 7월 개회 때는 고문으로, 9월에는 평의장으로 추대되어 모두 3번에 걸쳐 임원에 피선된 것이다. 또 그는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에 13회에 걸쳐 글을 게재하고, 특히 민족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산수와 역사지리를 밝힌 ‘대한지지(大韓地誌)’를 연재했다. 그는 대한협회에도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여 1909년 12월까지 임원 및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경기·충청 출신인사들이 1908년 1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자, 유근은 이상재·윤효정·정교 등 9명과 함께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학회는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에 맞서 교무지도와 재정후원에 힘썼는데, 유근이 이때 규칙검정위원에 임명되어 교무를 지도했다. 또 학회는 일반민중의 계몽을 위해 학보를 월간으로 발간했는데, 그도 신채호·이상재와 함께 필진으로 참여했다.
유근은 역사와 문화부흥을 위한 국학연구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참여한 조선광문회는 1911년부터 1918년경까지 약 20여종의 고전을 발간하고, 한국 최초로 국어사전과 현대적인 한자자전을 편찬한 대표적인 계몽단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