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대의 풍류 암각문 통해 확인
지역 문인들이 시회(詩會)를 갖던 곳…향토사적 의미 커
시기는 조선 철종 8년…양지 거주하던 학맥 되짚을 기회
양지면 공세울에 소재한 ‘가인암 암각문(可人岩 巖刻文)’자료가 용인향토문화지킴이 시민모임(회장 박용익)과 용인향토문화연구회(회장 홍순석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 공개 됐다.
박 회장은 지난 8월말경 이 암각문 자료를 발견한 후, 3개월간 검증자료를 수습해 향문회에 의뢰해 검증 작업을 마쳤다.
용인지역에서 암각문 자료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향토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양지면 공세울 제일초등학교 맞은 편에 선유대(仙遊臺)가 있었음은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仙遊臺’라고 새겨진 바위 밑에 새겨진 ‘가인암 암각문(可人岩 巖刻文)’자료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 없이 방치해 왔다.
금년 5월에 간행된 ‘양지면지(陽智面誌)’에도 “선유대: 제일리에 있는 버덩, 예전에 신선이 놀았다 함”(총설 29면)으로 간략하게 소개되었을 뿐, 선유대를 받치고 있는 이 바위가 ‘가인암’이며, 여기에 용인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암각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미 경기도 포천군의 암각문 자료를 조사하여 ‘포천의 암각문’을 학계에서 처음으로 발간한 바 있는 홍교수는 용인에서 암각문 자료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암각문 글씨 처음 고증>
지난 14일 오후 용인신문 취재팀과 박용익 회장, 홍순석 교수, 정영자씨 등이 참여하여 재실시한 현장조사 결과, 이 암각문이 새겨진 바위는 ‘가인암(可人岩)’으로 확인됐다. 암각문은 동북 양쪽 면에 새겨져 있는데, 동쪽면에 ‘풍월주인(風月主人)’이 횡서로, ‘가인암(可人岩)’‘이조원(李祖元) ‘이명희(李明熙)’라는 글씨가 종서로 쓰여 있다.
하단부에는 ‘이병은(李秉殷)’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이들 인명은 모두 1940년경 생존한 인물로 확인됐다. 북쪽면에는 ‘이준(李儁), 김병일(金炳一), 심 원 준(沈遠俊), 강진원(姜鎭元), 이조경(李祖庚), 구윤서(具崙書), 이조훈(李祖勳), 유영근(柳永根), 유방주(兪万柱), 이근학(李 根學), 임형준(任衡準), 임완준(任完準) 등 12명의 인명과 “諸公會輒詩酒/ 丁巳三月 日/ 李 柳章根 謹呈(여러 어른들이 모여서 번번이 시를 짓고 술을 즐기시기에 정사년 삼월 일에 이섭과 유장근이 삼가 올린다)”라는 명기(銘記)가 새겨져 있다. 명기를 통해 이섭과 유장근이라는 인물이 이 암각문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인적사항을 연안이씨, 풍천임씨 등의 족보 기록과 지역민들의 고증을 통해 확인한 결과, 이준(李儁:1809-1883)은 연안이씨 조묵(祖默)의 아들로, 공조참판 동경연춘추관사(工曹參判同經筵春秋館事)를 지냈고, 이조경(李祖庚:1826-1908)은 선공감역(繕工監役), 이조훈(李祖勳:1832-1911)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임형준(任衡準:1834-1901)은 풍천임씨로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이들의 생몰 연대를 참고할 때, 이 암각문을 새긴 정사년(丁巳年)은 조선 철종 8년(1857)이 된다. 지금부터 144년 전에 조성한 것이다.
<암각문은 144년전 조성>
홍교수에 의하면, 이 자료는 금석문으로서의 가치보다는 용인지역 향토사료로써의 가치가 크다고 보고 있다. 우선, 이들은 양지현의 추계, 공세울, 평창리에 거주하였던 학자이거나 문인으로, 이 곳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다는 점이 향토사료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동안 ‘충렬서원선생안(忠烈書院先生案)’을 비롯한 몇몇 사료를 통해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선생을 비롯한 여러 명현들이 용인지역에서 학자나 문인으로 활동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학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학자나 문인들의 활동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무관심 속에 방치했던 암각문 자료가 확인됨으로써 양지현 문인들의 활동상을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열린 것이다.
<양지면 문인들 연구자료 의미>
지금은 주변의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예전에는 선현들이 ‘선유대’라고 명명했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시회를 열어 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홍교수는 “이 자료의 발굴은 용인지역 향토사연구에 새로운 과제로 부각될 것이며, 향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인물의 전기적 사실과, 이곳에서 지은 시작품을 문헌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자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용인향토문화연구’(4집)에 발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