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의 양심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학자들의 책임과 의무는 자신들의 전공분야에서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검증하고 밝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국의 모 대학 교수들이 외국인의 논문을 그대로 베껴서 또 다른 국제학술지에 실었다가 발각이 되어 국가적으로 커다란 망신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근래 들어 대학마다 교수들에게 연구를 많이 하라고 독려하고 있고 이를 임용에서부터 승진심사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부 몰지각한 교수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 C 대학의 D 교수는 논문 쓰는데 전혀 기여한 바가 없이도 수 차례씩이나 외국 유명 학술지에 공동저자로 이름이 실렸다. 우수한 대학원 학생들이 모여있다는 A 학교의 박사과정 학생들의 논문에 지도교수 F의 이름과 함께 D의 이름이 실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D는 A 학교 학생의 학술 발표논문을 그대로 베껴서 국내학술지에 자신의 이름으로 게재하였다. 그리고 내 친구 K가 논문지도를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 뉵萱?논문에 K가 빠지고 위에서 언급한 D 교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D 교수는 자신이 몸담고있는 C 학교에서 연구업적이 훌륭하다하여 표창까지 받았다고 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A 학교의 F교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A 교수와 D 교수는 대학원생들이 밤낮으로 땀흘려 연구한 결과를 사고 팔았다는 의심을 받고있다.
일부 학생들은 부지런히 컨닝(치팅이라 해야 옳다.)을 하고 일부 교수들은 열심히 남의 논문을 베껴서 제출한다. 이렇듯이 우리 나라에서 소위 가방 끈이 가장 길다는 대학교수들 중에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것 뿐 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연구비를 타내기 위하여 처음부터 가능성도 없는 것을 그럴싸한 제목으로 위장하여 제안서를 낸다. 그리고 부지런히 로비활동까지 벌인다. 그렇게 허위로 뻥을 쳐서 타낸 연구비는 어떻게 쓰이는가? 연구 이외에 먹고 마셔서 낭비되는 돈의 액수가 놀라울 정도이다. 더욱이 가족들의 외식비 같은 개인적인 지출까지도 연구비로 충당을 하는 교수들이 있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국력의 차이는 여러 가지로 가늠할 수 있지만 양심이 지켜지는 지의 여부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셈이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한국의 연구비는 이탈리아나 영국보다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는 그 나라들에 비해서 형편없이 적다. 이는 연구 당사자들이 제사보다도 젯밥에 마음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필자는 정치가 개혁대상 1 순위라면 대학은 개혁의 0 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정치인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접촉해야하는 지역구 관리를 하다보면 돈이 안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부정이 옳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이해가 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직 그 중에서도 이공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만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 연구비를 착복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야기가 논문표절에서 연구비 착복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양심을 속이며 살아간다는 면에서 볼 때에 이 두 가지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소위 명문대 출신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명문대를 거쳐서 대학원공부를 마치고 대학교수까지 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양심적으로 떳떳하게 살아가는 자세는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의 열악한 교육 제도·환경에 있다. 아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 일변도만을 추구하는 쪽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한 아이들이 성장하면 위에서 언급한 몰지각한 사람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세 살 때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교육은 교육부 장관의 책임이 아니라 부모들의 책임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