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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세상-이광섭씨

용인신문 기자  1999.09.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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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덧씌워진 두꺼운 초가지붕, 대청마루위에 놓여진 쌀뒤주, 선반에 보관된 구한말의 화살, 처마에 매달린 싸리빗자루, 마당에 뒹구는 화로, 나무절구, 손잡이가 세 개 달린 시루, 멧돌, 내금 위장을 지냈던 할아버지가 타던 말의 장신구, 나뭇결이 살아있는 찬장, 커다란 김장독, 흙벽에 걸 린 갈퀴, 툇마루 선반에 올려놓은 150근, 250근 저울 3개, 외양간에 걸려있는 여물통, 소 코뚜레, 토종닭장, 불 때는 아궁이, 가마솥, 창고에 쌓여있는 장작더미,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자부동, 지하 냉장고, 500년된 느티나무로 만든 떡판….
포곡면 유운리 360번지 이광섭씨(56) 집은 살아있는 민속촌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곳.
철쭉과 향나무가 앞 뜰을 소담스럽게 지키면서 흙마당과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고 있는 기억자 집 맞은편에는 사랑채가, 왼편에는 커다란 벼창고가 서있다. 부가 저절로 느껴지는 집. 대지가 자그만치 1000평에 가깝다. 넓디 넓은 집 뒤란 장독대 옆에는 터줏가리가 서있고 밤나무 감나무 등 각종 유실수와 꽃나무가 빼곡하다. 흙돌담도 고스란히 남아 뒤란을 감싸고 있다.
고향 마을 어느곳 쯤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 개조한 곳 없이 원형 그대로여서 전통가옥으로 일찌기 지정 됐어도 손색이 없을 집이다. "권력과 부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터전은 아직까지 갖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의 100분의 1에도 못미치는 짧은 나열로 겸손해 하는 이광섭씨의 전통을 지키고 가꾸는 정성과 사랑을 이야기 하기에는 태부족 하다. 마당 구석구석, 방방이, 혹은 창고안 깊숙이 감춰진 옛것들을 낱낱이 들추자면 몇날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를 듯하다.
골동품상이 항상 이씨 집을 맴돌며 옛 물건을 팔으라 한다. 마당에 뒹구는 옛 물건들을 주인 모르게 슬그머니 줏어간 것도 한두개가 아니지만 이광섭씨는 웃어 넘긴다. 구한말 고종황제 때 남해현령 및 내금위장을 지내던 할아버지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삶을 고스란히 빛내며 살고 있는 이광섭씨.
이광섭씨는 청백리를 수없이 배출한 용인이씨 후손으로 3대를 두고 천석을 하던 천석군의 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사가 주업이더 시절에 사방 10리가 이씨네 땅이었을 만큼 부자였다. 선친은 포곡면장과 용인향교 전교(직원)를 지냈고 백부는 백현교장 등을 지냈으며 이씨 또한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5공화국 삼엄하던 시좆?평화민주당 용인지구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용인지구당 포곡 연락소장을 지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좋은 교훈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상님들의 맘이 고지식했고 청백했고 고집스러웠고 남한테 아부할줄 모르던 정신을 이어받아 나 역시 조상님들한테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정치에 몸담은 것은 부모님들이 부를 누리면서 혹 이웃한테 끼쳤을 지 모를 미안한 부분을 내 시대에는 겸허한 마음으로 절을 천번 만번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용인에서 이평화씨(태성학교 창립자)네와 함께 구한말 민영이 대감댁 마름이었던 이광섭씨네는 이평화씨네 다음으로 부자였다. 이광섭씨네 뒤란은 150평 정도 되는데 그곳에는 한양의 벼를 민대감이 5년동안 노적하던 곳이다. 대문 밖 행랑채가 있던 부분까지 약 4000평에 이르는 대지를 갖고 있는 이광섭씨. 대문 밖에는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 재벌들의 벼를 쌓아 놓았다. 대문안에 있는 창고에는 이씨네 벼를 쌓았다.
현재는 터전만 갖고 있을 뿐 옛날처럼 농사를 짓지 않는다. "농사가 주업이던 시절에는 초가지붕이 두껍고 장독대와 터줏가리가 큰 집이 부자였지요. 저희집 터줏가리는 민속촌의 그것보다 커요. 용인에서 제일 크지요. 지붕도 굉장히 두꺼웠는데 이제는 다 뜯어냈죠."
요즘도 격년으로 지붕을 보수한다. 볏짚이 마름으로 120마름이 든다. "이엉 엮는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요. 돈을 줘도 안와요. 다만 인간관계로 인정상 도와주는 거지요."
앞으로 초가 지붕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을 지 문제다. 이엉을 엮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씨는 힘들어도 전통을 지켜나갔지만 아들대에는 어찌 될지 걱정이 크다. 변경 하더라도 원형의 일부분을 갖고 있었으면 하는게, 터라도 지켰으면 하는게 이씨의 희망이다.
안채의 측면으로는 광과 지하실(냉장고)이 있다. 지하 냉장고는 땅을 깊게 파 시멘트를 발라놓은 곳으로 소작농들이 가져온 갈비에 닭에 꿀에 온갖 진상품이 넘쳐 흘렀다. "옛날에는 가을 추수때 대지주를 빈 손으로 찾는 법이 없었지요. 시대가 그랬어요."
이씨는 사랑채의 걷어 올리는 방문은 할아버지가 대궐을 원본으로 삼아 만들었다고 말한다. 민대감이 오면 마루방 사랑방 등 3개의 방을 터서 손님을 맞던 곳으로 창살이며 형식이 궁궐의 모습 그대로라고 말한다.
이씨의 집은 지금으로부터 105년 됐다. 할아버지가 3살 때 이사와 자그마한 집을 크게 늘린 것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연탄 보일러를 때지만 겨울에는 86세된 노모 방에 장작불을 지펴 뜨뜻하게 해 드린다. 어머니한테 2가지만이라도 잘해드리고자 한다. 방 따뜻하게 해 드리는 일과 말대답 하지 않는 것. 이씨는 이 두가지를 철칙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토지 개혁으로 땅들이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남 부럽지 않을 정도는 가지고 있다. "남들은 왜 일을 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난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는 그 순간을 일등 행복으로 여깁니다. 손 보세요. 농사 짓느라 이래요."
투박한 손을 보여주는 이씨. 자가용 한 대 있어도 될 듯한데 자전거 4대가 고작이다. 콜택시 부르면 5분 안에 차가 오는데 뭣하러 자가용을 사느냐는 주의다.
이평화씨가 태성학교를 세운 반면 아버지를 초등학교 5학년 때 여위는 바람에 가문이 사과나무를 심지 못했음을 안타까와 하는 이씨.
청백을 좌우명으로 삼는 그는 배고픈 이웃의 삶을 걱정하면서 근검 절약하는 가운데 조상들의 유산을 고스란히 지키며 영원히 소박하게 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