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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생산적인 대화의 요건

용인신문 기자  1999.09.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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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유머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폴란드의 루블린행 열차에 올라탄 젊은이가 옆 자리의 상인한테 가서 "지금 몇 시입니까?"라고 물었다. 상인은 대뜸 "지옥으로 꺼져버려"라며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요? 저는 공손하게 여쭸는데 어찌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시지요?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상인은 지친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꺼냈다.
"좋아, 이리 앉아 보게. 얘기해 주지. 자네가 시간을 물으면 내가 대답하겠지. 그러면 우리는 자연히 날씨, 정치, 사업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게 될 거란 말이야. 차를 계속 타고가는데 거기서 그치겠어? 이야기 물꼬가 터져 이런저런 화제가 잇따르고 자네가 유태인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나도 유태인이고 루블린에 살지. 자네는 그곳 사람이 아니잖아. 그래서 친절한 내가 자네를 우리 집에 초대할 거야. 그러면 자연스레 내 딸을 만나게 되지. 내 딸은 아주 예뻐. 자네도 잘 생겼고. 그러니 둘은 몇 차례 데이트하고 사랑에 빠지지 않겠어? 그 다음엔 딸년을 달라고 할 게 빤해. 결혼문제에 대해 지금 당장 대답해 주지. 나는 시계도 없는 사람한테 절대 내 딸을 줄 수가 없어."
이것이 바로 상인이 젊은이에게 시간을 말해 주지 않은 이유이다.
이 유머를 통하여 유태인들은 대화의 형식에 대해 주목한다. 대화라는 것은 두 사람이 번갈아 말하는 것이 기본 형식이다. 상인과 젊은이의 대화 형식은 외형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상인의 장황한 얘기 속에는 젊은이 몫까지 다 들어있다. 상인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날라리까지 불러제낀 꼴이다. 이처럼 기본 형식의 파괴로 엉뚱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이 우스개의 핵심이다.
상대가 있음에도 혼자 말하는 형식이 없는 건 아니다. 모노드라마, 기도, 연설 등이 이런 유형이다. 또 술자리나 평범한 사람들의 잡담에서는 순서가 다르고 말하는 분량이 불균형을 이루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사소한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감사, 대정부 질의, 학술회의, 기자회견 등은 철저히 일문일답 형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도 가능하면 질문은 짧고 대답이 길도록 유도해야 한다. 거기서 나온 답변은 사회적 국가적으로 중요한 공적인 것들이므로 열심히 들어 면밀히 분석하고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어긴 질의응답을 어디서든지 쉽게 볼 수 있다. 국회나 지방자치의회에서는 의원들이 질문은 장황하게 하고 답변은 듣지 않은 채 만??뜨는 일이 다반사다. 그로 인해 유권자에게 돌아가는 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자회견장에 가보면 언론인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으레 나타난다. 자기가 아는 것을 과시하려다 보니 질문은 끝없이 길어지고 대답은 짧아진다. 심지어 인터뷰 기사에서도 대답보다 질문의 분량이 더 많은 경우가 있다.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으로 언론의 공적 기능을 망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학술회의장도 이에 못지 않다. 토론자의 질문인지 지식 과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발언이 비일비재하다. 기관, 단체, 직장의 고위간부들 가운데도 이처럼 혼자 떠들다 회의를 끝내는 이가 많다. 구성원들을 피곤하게 할 뿐만 아니라 조직의 장래까지도 망치는 사람들이다.
루블린의 상인같은 사람들이 사회 도처에 널려 있다. 그래도 그 상인은 듣는 사람들을 웃게 해주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의원, 언론인, 학자, 경영인들이 그러면 국가와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는 엄청나다.
앞으로도 우리는 수많은 국정감사, 대정부 질의, 지방자치단체 의정활동, 학술회의, 토론회 등을 통하여 중요한 일들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이처럼 대화를 통하여 사안을 이해하고 판단하여 결정을 내리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 그것이 무력이나 폭력으로 모든 것을 전횡하는 독재사회보다 낫고,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다수결제도의 결함을 많이 보완하여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황하게 질문만 하다 핵심을 짚지 못한다면 그런 대화는 아무런 이익도 낳지 못한다. 유권자는 루블린의 상인같은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