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옹(拙翁) 이성동(李成童)의 묘갈(112cm×46cm×18cm)을 살펴보니 원래의 묘갈은 마모되어 자획을 알 수 없고 숭정갑신후사신유이월(崇禎甲申後四辛酉二月)-철종2년(哲宗2年:1861年)-에 11대손 동욱(東旭)·동식(東寔)등이 찬하고 써서 세웠다고 하며 아버지는 ○○○○○희영(希潁)이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경주이씨이다.
천순4년 경신(天順四年 庚辰:1460)년에 태어나고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천성이 정직하며 독서에 열중하여 분발하는 가운데 어른들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홍치2년 기유(弘治二年 己酉:1489)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갑인(甲寅:1494)에 문과에 급제하니 훌륭한 선비가 되었다.
정덕정축(正德丁丑:1517)년에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듬해에 우승지(右丞旨), 기묘(己卯:1519)년에 예조참의,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10월에 조정암(趙靜庵) 등과 합사(閤司)하여 정국공신 76명의 관직을 박탈하고 현량(賢良)을 등용하라고 상소하여 정치개혁을 하고 도덕정치를 실천하라고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니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게 어 조정암, 김충암(金沖菴:金浮) 등 여러 사람이 투옥 당함에 같이 처벌 받기를 상소하니 관직을 삭탈 당하였으나 곧 복직되어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중인 경지(庚辰:1520)년 5월 2일에 사망하였다. 또다시 조정암 일파로서의 죄가 추론되어 관직을 삭탈 당하니 중종 16년(中宗十六年:1521)이다. 영조 정묘(英祖丁卯:1747)에 신원이 복원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고 기록되하고 있다.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에 따르면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관련된 인물은 270명이 넘는다. 기묘8현(기묘8현)인 정광필, 안당, 이장곤, 김정, 조광조, 김식, 기준, 신명인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다. 이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죽거나 관직에서 쫓겨나는 등의 비운을 면치 못하였다.
연산군과 중종.
연산군은 폭군이라지만 그가 가까이 했던 임사홍, 신수군, 유자광등의 신하를 한결같이 대했지만 죽이거나 피해를 준 일은 없었다. 반면 중종은 조광조를 신임하여 그 일행을 가까이 하다가 하루 아침에 마음이 변하여 사약을 내렸으니 역사의 한편으론 누가 더 폭군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이성동의 묘를 찾다보니 비문이 마모되어 판독하기 어려웠고, 묘소의 위치도 순서대로 쓴 것이 아니라 언듯 이율곡의 묘에서처럼 뒤바뀌었으니 이번 일로 더욱 절실히 느끼는 것은 향토유적에 대해 집필할적에 현장답사에서 사실을 확인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책상머리에서 남의 책을 베끼는 것이 잘못된 것은 틀린 것이 마치 사실인냥 곡필될 가능성이 짙어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