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에 문수산에서 바라본 원삼들녘은 멀리 백암까지 아지랑이가 피어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 내 발밑 산자락에까지 미친다. 그 산자락에 가리워진 마을은 마치 은자(隱者)의 나래를 펴기위한 듯 생기가 돌아 보인다.
고인돌, 선돌, 마을지킴이 장승(벅수), 그리고 미래를 꿈꾸는 듯한 미륵불의 자취들…. 그 자욱을 더듬으며 발길을 옮기니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내(川)의 사금광(砂金鑛)터는 연못이 되어 사암리 저수지의 물막이 노릇을 하고 있다. 면소재지인 고당리(高塘里)에는 돗(帆)이 안 보이니 웃절꼴(何寺洞:어찌절골)이 되었는가.
선돌을 다시보며 모새고개에 이르니 삼막골이란다. 곡모산(谷慕山) 넘으니 앗! ‘돌장승’, 무덤앞의 돌장승, 눈꼬리를 치켜올린 왕눈의 지킴이, 만나는 순간 새로운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는 그를 요리조리 살펴보곤 사진을 찍고 어루만지며 돌아서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고장에서 보기드믄 조선조 초기의 조형기예(造形技藝)이기에 말이다. 구수한 멋과 익살이라할까? 중부와 남해는 해학을 잃지 않은 우리의 예술성이 담겨있다는 속삭임에 콧등을 잡으니 오간데가 없더라며, 아기를 낳지 못했다는 어느 여인네의 모습이 아련하다며 너덜댄다.
일반적으로 문인석은 이승(生)과 저승(死)의 갈림길에서 눈을 아래로 살포시 감아내리며(명복을 빌 듯) 그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웃음의 언저리가 보이는데, 이 문인석은 비바람에 깍기고 깍였는데 5∼600년전인 듯 보이는 병조참의 설풍(兵曹參議 薛馮)의 묘이다. 그 아래 30보쯤되는 곳에 자그마한 비석(100×31×15)이 하나 있는데 총알에 맞은 듯(6.25전란의 흔적) 한 가운데가 패어있다. 비록 작은 묘표이지만 비바람에 마모되어 글씨가 보이지 않지만 흥미있게 보여 탁본을 하니 『○○부위 ○○○ 사정 설성길지묘(○○副衛 ○○○ 司正薛性吉之墓)』라 써 있지 않은가!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오위(五衛)에 속하는 적순부위(迪順副衛)이며 사정(司正)이 아니런가. 다시 살펴보니 왼쪽에 정통육년 신유삼월입(正統六年辛酉三月立)이라 기록하였다. 즉 세종(세종) 23년, 서기로는 1441년이다. 이는 기록물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니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