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헌에 고려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품질이 좋아서 고려지에 글을 써보는 것이 선비들의 일생의 소원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고려지의 우수함은 이미 증명됐다. 예로부터 한 장의 한지를 만들기 위해 손이 99번 가고 사용하는 사람의 손이 100번째로 간다고 해서 일백백자를 써서 백지라고 했다. 그만큼 제조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단절된 전통한지의 맥을 이으며 평생 험난한 외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고유한지연구소 대표 유운영(68)씨. 그는 화공약품과 기계를 이용한 개량한지에 밀려 언제 사라져버릴 지 모를 위기에 처해있는 전통한지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근 50여년간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면서 옛 명성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그렇다고해서 유운영씨는 제조비용도 많이 들고 손도 많이 가는데다 용도도 일본의 화지처럼 다양하게 개발되지 않아 푸대접 받고 있는 전통한지의 현실을 뒤바꿀 힘은 없다. 다만 뿌리라도 지키고 있어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한지 제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유운영씨는 수지읍 신봉 2리 태봉암이라는 작은 암자 바로 밑에 살림집을 겸한 연구소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소는 비닐하우스로 지은 볼품없는 움집에 불과하고 종업원도 없이 혼자 연구하고 일한다. 전통을 지켜나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땅을 빌어 움집을 장만했다. 움집 한켠에 자그마한 살림집을 제외하고는 안이며 바깥이며 모두 한지 제조에 쓰이는 기구들로 가득차 있다. 집 주변으로 임대한 논밭에는 곡식과 채소 외에도 한지의 재료인 닥나무와 쪽풀들을 심었다. 황촉규라는 닥풀도 심어져 있다. 논에서 거둬들이는 볏짚도 잿물 만드는 데 이용 한다.
한지에 문외한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에서 흔하게 보는 개량한지를 전통 한지로 착각하면서 전통의 맥 운운하는 것을 의아해한다. 그러나 전통한지 제조에 관한 국내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연구실적도 미미한 상황이다. 게다가 전통한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벗기는 사람도 구하기 힘든데다 일당도 비싼 것은 물론 수입산 닥나무에 밀려 국산 닥나무는 묘목마저 구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같은 험난한 여건상 전통한지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춰 명맥마저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고 보면 유대표의 전통을 잇는 수고로움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유읏돗쓴?과거에 배운 그대로 재현도 하고 연구도 하지만 사실 어렵고 힘든일이 많다.
그래도 그는 조상들의 기술을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도 슬기롭고 자랑스런 생각이 들어 이 기술을 꼭 후세에 남겨주고자 하는 신념으로 수십년동안 빈농생활 속에서도 실험을 굽히지 않는다. 현재 유대표는 잠견지를 연구중이다. 한지로 한복을 만드는 김경희 할머니(85)가 고서에 나와있는 잠견지라는 문구를 유대표한테 보여준게 계기다. 요근래 써본 사람도 없고 만든 사람도 없이 문구만 남아있는 영원한 물음의 잠견지. 그는 화두처럼 다가온 잠견지를 연구하고 실험했다. 마침내 누에고치에서 나온 실을 섞은 잠견지 제조에 성공했다. 잠견지는 먹물을 멈춘다. 즉 먹이 번지지도 않고 뒤로 배나오지도 않는다. 서예를 하는 사람들한테 매우 요긴할 것으로 보이는 잠견지를 유대표는 곧 특허를 낼 예정이다.
그는 치자나 쪽같은 천연 염료를 사용해 천연 염색 한지도 제조하고 있다. 조상들도 한지를 물감통에 담가 사용했을 뿐 유 대표처럼 원료 자체에 물감을 섞어 종이를 뜨지는 않았다. 예전 것이 쉬 바래는 반면 천연 염색 한지는 볕을 봐도 그다지 바래지 않는다. 실패에 굽히지 않는 유운영씨는 중요한 업적을 하나 둘 쌓아가고 있다. 그의 전통에 대한 사랑은 병에 가깝다. 판로도 소수의 동양화가들의 주문외에 거의 없는 실정이지만 전통한지는 인생의 전부다.
전북 완주군 삼례면 석전리에서 태어난 그는 왜정때인 7세때 부모와 함게 만주 간도성으로 이민했다가 부모 모두가 작고한 해방 직후인 12세때 한국으로 나왔다. 이리초등학교를 마쳤고 이리농림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형님들의 형편이 좋지않아 중퇴했다. 18세의 그는 먹고 살아야 했다. 간단하게 기술을 배울 수 있는데다 자금이 없어도 사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 아래 전북 완주군의 한지 제지 공장을 택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종이 근처를 맴도는 삶을 산다.
그곳에서 전통한지 제조법을 부친에게 배워 한지를 제작하던 김갑종(79) 선생한테 전통 제조법을 전수받았다. 일을 배운 유대표는 그후 각처의 제지 공장을 헤맸다. 그러나 공장에서 만드는 한지가 전통한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을 하면서 한지 공장을 그만뒀다. 그후 펄프 공장에도 다니고 특수지를 제조하는 제지공장을 운영하기도 하면서 배회했다. 한때는 아예 종이와는 거리가 먼 이화여대 약초원의 관리인으로도 있었다. 그러나 유대育?기술을 아까와 하는 주변 사람들이 왜 그좋은 기술을 썩히냐며 다시 종이일을 하라고 권했다. 격려에 힘입은 그는 82년 경북 안동에서 옹천제지 공장의 일부를 빌려 본격적으로 전통한지 제조에 나서게 됐다. 이때 안동대 동양화과 권기윤 교수와 인연이 맺어져 서울로 소개가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화 됐고 87년 용인 신봉리로 올라오게 됐다. 그해에 고유한지연구소를 개설했고 93년 한솔제지 전통한지 재현 자문위원으로, 96년 통상산업부 장관으로부터 공업기반기술개발 기획 평가단의 전통고유기술 분야 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명성을 쌓아 가기 시작했다.
용인 송담대 전통한지연구소를 비롯 충북대, 성심여대 특별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특강과 시연을 하기도 한다. 현재 전통공예기술분야 인물로 문화재관리국에 서류가 접수된 상태로 오는 10월 관리국에서 실사를 나와 별문제가 없으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충북대 한 여학생이 유대표의 전통제지법의 낱낱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쓰고 있어 그의 기법이 학계에 영원히 남게도 됐다. 유운영씨는 인사동에 개량한지뿐 전통한지가 없다고 한탄한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개량한지를 전통한지라고 하는 점이다. 유대표는 전통이라?말의 남발에 질려 자신의 연구소 이름을 아예 토착수록한지 연구소로 바꿀 예정이다. 수록지란 손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한지는 원래 닥나무껍질을 가공해 일체의 화공약품 없이 손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다. 조선조 말엽 일본을 통해 서양식 기계에 화공약품을 사용하는 개량한지가 생산됐지만 1000년을 가는 전통한지의 발뒷꿈치도 따라오지 못한다.
과학적 데이터를 통해서도 1000년 이상을 보장하는 최고급지임이 판명난 세계적 전통한지. 그러나 유대표는 최근의 문화재 복원에 개량한지가 쓰이고 있는 현실에 부끄러움과 전통의 원형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애로같은 것, 금전같은 것은 신경도 안쓴다.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다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통한지로 역대 대통령의 비망록을 만들고 대학 졸업장 같은 중요하고 의미있는 문서를 만들어 박물관에 보존했으면 하는 소박한 소원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려면 정부차원에서의 양성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국 한 박물관에서 유대표를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화학약품이 전혀 들어가지 않고 1000년 이상을 보장하는 과학적 근거의 한지가 영국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묵묵히 전통한지에서 삶의 기쁨을 얻는다. 아버지가 걸어온 삶이 어떤 것인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아들이 뒤를 잇겠다고 나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옛말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유운영씨의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그는 언제 쫓겨날 지 모르게 됐다. 작업장 옮기는 일이 시급한 문제다. 용인에서 계속 한지를 제조하고 싶어 국유지를 알아보고 있지만 어찌될 지 모른다.
지자체에서 관심을 갖고 전통을 연구하고 지키는 사람에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 방안 모색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현시대에 역행하는 일로 보여질 지도 모르겠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뿌리인 전통 문화를 버려서는 안되겠다는 나름대로의 신념으로 한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나즈막한 그의 한마디는 차라리 슬픔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