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조사위원 회의를 마치고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 길에 올랐다. 오랜만에 들른 청계천의 고서점(古書店)이 오늘따라 새롭게 와 닿았다. 단골 책방이 문을 닫아 아쉬웠고 나머지 서점들은 대부분 학생들을 상대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두리번 거리니 한지 묶음이 보이기에 얼른 손을 뻗어 펼쳐보았다. 아! 그런데 내용인즉 용인군 남사면 방아리, 봉명리 전궁리 등의 리명(里名)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피니 남사면 천석꾼의 추수기(秋收記:24×36.5cm/한지)였다.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니 용인향토사학자인 나에겐 이만한 보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장을 살펴보니 토지소재지명, 급, 평명(土地所在地名, 及, 坪名), 지번(地番), 지목(地目), 지적(地積, 과세가격(課稅價格), 열수(논배미 수), 도별(賭別:도지 걷우는 방법), 수량(數量), 봉인(封印:확인표시), 비고(備考), 작인(作人:경작자) 등의 11개 항목을 세로로 구분해 놓았다.
가로는 7줄로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논 1,100두락(斗落:마지기) 대지(垈地)와 밭 약 20,000평이나 된다. 마지막의 실수봉도총계g(실수봉도총계표)에 의하면 관리인은 9명으로서 각리별(各里別)로 한사람씩 위촉하였다. 수입 총계는 790석(石)이나 실입금(實入金)은 14.18만엔(丹)이다. 작답(作畓:밭을 논으로 만들기) 등을 감안한다면 1,000석(石)꾼의 재산이 된다.
여기서 잠시 그 시절(1930년대)를 회상해 보자. 당시 군청서기의 월급 평균이 20엔이었다고 한다. 또 이즈음 용인에는 영업용 택시가 3대 있었다고 하며 용인에서 수원까지의 운임은 1엔50센이며 팁이 1엔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추수기에 나오는 천석꾼의 재산은 그야말로 어마어마 한 것이다. 이 정도의 재산이면 서울의 전문학교나 일본에 유학시킬 수 있는 유복한 집안인 것이다.
다시 추수기 내용을 살펴보자. 그 목록을 자세히 살피니 토지 소재지의 마을과 들, 골짜기 등의 이름인 갈음들(葛飮坪), 질구지들(疾九知坪), 원산점(圓山店), 외암동(外岩洞), 말우들, 내성골(內性谷), 옥허골(玉墟谷), 구명골(九命谷) 등 수 많은 지명이 적혀 있어 그 잊혀진 지명 뿐만 아니라 현재지명의 유래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었다.
이 문서는 1930년경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자작농(自作農)은 논이 19마지기 밭은 678평이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는다.
마을이름 등은 계속 연구해서 현재와 연관관계를 밝혀 향토사에 진일보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