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롤스 로이스”, “인간이 갖는 최고의 미를 끌어내 주는 가장 창조적인 패션”, “하나의 신화”, “이태리 모드의 거장” 등등,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가 창조한 브랜드 발렌티노가 듣는 찬사는 다양하고도 파격적이다.
그의 화려한 고객리스트들에는 재클린 케네디 (Jacquelin Kennedy)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아리스토틀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와 결혼할 때 웨딩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다. 재키 말고도 그의 고객 중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글로리아 기네스, 베베 팔레이, 파라 디바, 오드리 햅번, 소피아 로렌 등이 있는데, 파라 디바는 그녀가 망명하기 전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그의 코트를 입기도 했다.
<오랜 무명시절을 극복한 뛰어난 디자인>
발렌티노 가라바니( Valentino Garavani )는 1932년에 전기부품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을 가지면서 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어했는데, 불어로 공부를 지도받은 덕분에 17세 때 프랑스로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미술학교와 꾸띄르 양성을 위한 학교를 수료한 그는 장 데쎄(clean Dessas) 샵에서 견습 일을 맡은 뒤, 기 라탐?Guy Laroche)사에서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1959년에 로마로 돌아온 그는, 일년 뒤 아버지의 도움으로 자신의 작은 아뜰리에를 콘도티(Condotti)에서 열었고, 1967년에는 그레고리아나(Gregofana)로 옮겨갔다.
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2년 외국 바이어들과 저널리스트들의 관심을 끌었던, 프로방스의 피티(Pitti ) 궁에서 열린 패션쇼에 그의 첫 작품을 출품하면서부터였다. 이때 그는 어떤 디자이너보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한 저널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마치 자생하는 귀족적인 창백함과 같다."라고 논평했다. 황홀하고 화려한 색들이 유행되고 있던 당시로서는 발렌티노의 작품들은 독특함과 저력으로서 화제를 모으며 유행하기 시작했다.
발렌티노는 파리 패션계의 진출에 실패한 뒤 이태리에서 재기, 다시 파리 패션계에 도전하여 정상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의상들은 오랜 시간동안의 무명시절을 통해 자기만의 패션철학과 노하우, 자신감으로 무장되어있다. 또한 발렌티노의 옷들은 보수적이면서 엄격한 디자인 철학으로 완벽성을 추구한다.
<“패션은 엄연한 예술이다”>
입 생 로랑의 수제자인 삐에르 베르제는 발렌티노 이玲〈?어떤 다른 이탈리아 디자이너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그를 격찬한 적이 있다.
그는 “패션을 돈벌이 수단이나 여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패션은 엄연한예술이다. 생활 속에 묻어 있는 예술이라는 것이 순수예술과 다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예술혼 때문인지, 발렌티노의 수트를 입어 본 사람은 누구나 옷이 갖는 완벽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 내부에도 우아하고 멋스러운 스타일이 존재했음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태리 디자이너이지만, 그 작품 속에는 프랑스의 자수법과 이탈리아의 직물 및 장인정신이 어우러져 있다. 그의 기성복은 프랑스에서 제작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옷들 자체가 밀라노풍의 기성복과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렌티노의 남성라인, 발렌티노 워모(Valentino Uomo)는 언제부터인가 멋쟁이 남성들 사이에서 남성의 워드로브를 풍부하고 세련되게 완성시키는 기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장이면서도 부드럽고 우아하게 느껴지는 발렌티노의 수트는 오늘날 “진짜 멋쟁이 중의 멋쟁이” 만이 즐겨 입는 옷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최근 발렌티노는 젊고 재능있는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꿈을 좇아 조국을 떠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이탈리아에 패션 스쿨, 도서관, 박물관등을 세울 계획을 구상하면서 여전히 패션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