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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깬 충혼의백(忠魂毅魄)

용인신문 기자  2002.10.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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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의 파적한담(破寂閑談) 2

공양왕때에 정공(포은 정몽주)이 상신(재상)으로서 홀로 태조(이성계)에게 붙지 않았다. 태조 문하 제장들이 조영규로 하여금 철추(쇠몽둥이)로써 다리 위에서 추살하매 따라서 고려가 망하고 왕조가 옮겨 졌다.
후에 본조(조선)에서 본조의 직함인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종하고 용인의 묘앞에 조선의 직함을 써서 비를 세웠더니 즉시 벼락이 떨어져 비가 파쇄되었다.
정씨 자손이 고려수문하시중의 직명으로 고쳐 쓰기를 청하였더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사하다. 충혼의백이 사후에서도 없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두려운 일이다. -택리지 팔도총론-

恭讓王時 鄭公以相臣 獨不附於太祖
太祖門下諸將 使趙英圭以鐵椎 椎殺於橋上 而麗祚遂移矣
後本朝追贈以本朝 職銜 議政府領議政 立碑龍仁墓前 卽雷擊碎之
鄭氏子孫請改書 高麗守門下侍中職名 而至今無事
可見忠魂毅魄之 死後不泯也 其亦可畏也已

포은선생의 유택이 용인에 마련되면서 여러 가지 전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모현면(慕賢面)의 본래 명칭은 쇄포면이었는데 포는 선생의 유해를 모시고 나서 “현인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그곳을 모현면이라 고쳤다”든지 선濂꼈?순절하신 뒤 풍덕군에 일시 평장하였다가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코자 했을 때 “풍덕에서 오신다(豊德來)”는 지명이 있는 수지의 풍덕내에 이르자 행에 앞에 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가다가 지금의 묘소위치에 떨어져 장사를 모셨다는 등의 풍설이 있다.
택리지의 팔도총론편에 사후의 영계에 이르러서도 고려의 충신으로서 생전과 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과 지조를 지키려 했다는 사건이 용인의 묘 앞에서 벌어 졌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또 하나의 전설적인 기록이다.
이 한 구절의 기록만을 생각할 때 이 얼마나 장엄무상한 포은 정신의 극치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종 12년(1517)년에 세운 포은 선생 묘표를 보면 비양(전면)에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 새기고 음기에 문충공(조선에서 추증한 시호)이라 쓰지 않은 것은 “대개 공께서 두 성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其書官繫以高麗不書文忠公者 盖明公不事二姓之本意也-라 새겨진 것은 택리지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는 내용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실시되는 “율곡(이이) 문화제” “남양주의 다산문화제”“남명(조식) 선비문화제”와 같이 인물중심의 축제문화가 있다. 이들에 비추어 볼 때 충의백의로 일컬어 지고 있는 포은 선생은 동방이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대학자인 동시에 그의 사상적 영향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근간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고장에서 선생의 뜻과 정신을 기릴만한 포은제라든지 그와 관련된 행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선생에 대한 적지 않은 결례(?) 아니면 푸대접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년 6월을 계기로 포은 문화제를 전국적인 문화이벤트로 격상시키는 방안을 연구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