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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아물지 않은 상처

용인신문 기자  2002.11.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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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의 파적한담(破寂閑談)5-임진왜란과 광교산

陰風吹折大將旗 음풍이 불어 대장기를 꺾으니
數萬雄兵似草靡 수만의 웅병이 풀 쓰러지듯 하였구나
回首關西駐輦處 관서 임금계신 곳으로 머리를 돌리니
空敎志士淚雙垂 속절없이 지사로 하여금 두 줄기 눈물을 드리게 하네

이 한 구절의 싯귀는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전해오는 것으로 시의 출처와 배경을 알려면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92년 4월 14일 새벽,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적 선봉부대가 소리 없이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15일 동래성이 왜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동래부사 양사언이 전사하고 개전된지 나흘째 되는 4월 17일에 이르러서야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로 왜적이 부산포로 침공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이의 급보를 보면 “적군은 마치 신병과 같아서 아무도 당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고목을 잡아 사람을 향하여 쏘면 저절로 죽는(一把古木 向人別死) 신병기(조총)를 갖고 있어서 나 또한 죽을 수밖에 없을 듯 하다”는 내용이었다.
왜적의 3개 진공 노선 중 2번대 ‘가또오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충주에서 음성, 죽산, 양지를 경유 5월 1일 용인을 거쳐 2일 한강에 진출하였고 3번대 ‘구로다 나까마사’ 역시 5월 5일경 청안, 진천, 죽산, 용인을 거쳐 도성에 이르렀다.
선조 임금은 부랴부랴 서순하여 평양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삼남에서 근왕병이 일어났으며 전라순찰사 이광이 이끄는 근왕병 10만여명은 5월 6일 진위현을 경유하여 6월 3일 용인에 진병하였다.
그리고 6월 6일 수지의 광교산에 둔치고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양천포구에서 도강하여 행재소로 북상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때에 적의 기마대가 급습해 왔다.
이광의 군사들은 아무런 경계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방심하고 있다가 이처럼 급작스런 적의 기습을 받자 혼비백산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맨 앞에 나타난 적5∼6명은 금칠한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백마를 탔으며 백색의 교룡기를 등에 걸친 채 큰 칼을 휘두르며 날뛰는 꼴의 광대와도 같았다.
또 적장 ‘와끼자까’ 수하의 주력 1천여명은 귀신의 탈과 현수의 몸치장으로 조총과 활을 쏘고 창과 칼을 휘두르며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날뛰며 달려들매 근왕병들은 저승사자를 만난 듯 일대 공황을 일으켜 흩어지면서 창과 칼에 서로 부딪치고 찔리면서 적에게 죽기보다는 자중지란으로 살상당하는 사고가 더 컸다고 하였다.
‘연려실기술’을 보면 이 대목에 이르러서 “10만의 병사가 한꺼번에 흩어지는 소리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적고 있거니와 ‘난중잡록’에는 “용인 광교산 싸움에서의 패보를 접한 행재소에서는 그로부터 5일 후가되는 6월 11일 의주로 몽진하면서 다시는 남쪽에서 구원병이 올 것을 기대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모두가 장탄식을 금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시는 고작 기천에 불과한 왜적에게 참담히 무너진 전쟁터의 여운을 담은 것이며 풍덕천에 세워진 임진산성유물 전시관은 몇 백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그 날의 역사를 실증하는 현장으로 남게 되었다.